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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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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굳이 요악하자면 '인생은 짧고 영화는 길다'라고 해야 할까.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새 영화 '바빌론'에서 인간들은 몰락해 사라지지만, 영화만큼은 끝까지 살아남았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런 영화를 향한 예찬이며 헌사라고 해야 하나. 글쎄, 그깟 영화라는 꿈 때문에 너무 많이 다치고 너무 자주 아프고 크게 좌절하다 죽어버리고 마는데 그 무슨 어울리지 않는 상찬인가. 그런데 문제는 이 빌어먹을 놈의 영화가 누군가에겐 꿈이었고 사랑이었고 희망이었다는 것이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데 그만큼 열렬히 사모할 수밖에 없단느 얘기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한 영화인 '바빌론'은 셔젤 감독이 애(愛)와 증(憎), 미(美)와 추(醜)를 양손에 쥔 채 완성한, 영화 바로 그놈이다.


'바빌론'은 영화 얘기를 제대로 해보기 위해 1920년대 할리우드 태동기로 향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어가며 끝을 모르고 몸집을 불렸고, 영화 산업 역시 비약하고 있었다. 영화판은 무성영화 전성기 끝자락에서 유성영화로 전환을 시작하던 격변기였고, 사막 한가운데 할리우드라는 별천지가 들어서던 격동기였다. 셔젤 감독은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시대의 끝을 잡고 벼락스타가 된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그리고 "뭔가 더 중요한 일을 해보고 싶다"며 미국 영화판에 뛰어든 멕시코 청년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 사이를 189분 간 오가며 낭만·도전·광기·혼돈·사랑·꿈·좌절·돈·마약·술·섹스·희망으로 영화를 칠갑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영화 '아티스트'를 떠올릴테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생각날 것이다. 일부 대목에선 '헤일, 시저'를, '위대한 개츠비'를, '시네마 천국'을,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기억해낼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엔 '사랑은 비를 타고'를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바빌론'은 명백히 셔젤의 영화다. 이 작품의 광기는 '위플래쉬'(2015)가 보여준 예술에 대한 태도를 할리우드 전체로 퍼뜨려 놓은 듯하고, 낭만과 사랑과 꿈과 회한은 '라라랜드'(2016)에서 목격한 바 있다.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긋지긋한데도 또 다시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빛은 '퍼스트맨'(2018)에서 봤던 그것이다. 러닝 타임을 꽉 채워놓은 재즈는 또 어떤가.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로 할리우드의 재즈 아이콘이 된 셔젤 감독은 영화의 배경으로 이른바 '재즈시대'로 불린 시기를 소환한다.


어떻게 보면 '바빌론'은 캐릭터 영화다. 그 대상은 잭 콘래드도, 넬리 라로이도, 매니 토레스도 아닌 영화라는 캐릭터다. 세 명의 주인공 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 모두 영화와 영화인, 영화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에피소드 역시 할리우드가 어떤 곳이고 그곳에서 탄생한 영화들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는 데 복무하는 듯하다. 이같은 정체성은 평론가 엘리노어(진 스마트)가 콘래드에게 "당신의 시대는 끝났어도 당신의 영화는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바빌론'에 따르면 영화는 마법이고 기적이며, 꿈이고 도전이며, 환희이고 기쁨이며, 사랑이고 희망이다. 그런데 '바빌론'은 동시에 영화는 난장판이고 좌절이고 절망이며 돈 밖에 모르고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종을 차별하고 음산하고 음침한데다가 천박하고 너절하며 똥이고 토악질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바빌론'은 등장 인물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영화의 영화성에 골몰한다. 콘래드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구체화되지 못하고 영화사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중의 한 명으로 묘사되는 데 그친다. 라로이 역시 한때 화려하게 빛났지만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도태돼서 사라진 수많은 배우 중 한 명 같다. 토레스가 영화판에서 키워가는 야심이나 라로이를 향한 사랑 또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언제 어디에나 존재했던 이야기처럼 보인다. 다른 캐릭터들도 다르지 않다. 다소 과장돼 보이는 오프닝 시퀀스나 방울뱀 장면, 맥케이의 지하 동굴 에피소드 등도 스토리 중 한 대목으로 보기보다 '영화의 영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의미가 눈에 들어온다. 종반부에서 영화 역사를 바꾼 상징적 작품들의 한 장면이 연달아 붙어 나오는 것 역시 '바빌론'의 정체와 목표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아무리 영화에 관해 얘기한들 관객이 없으면 영화도 없다는 걸 '바빌론'은 잘 알고 있다. 영화의 형태를 바꿔 놓는 것도, 영화의 역사를 쓰는 것도, 스타를 탄생시키고 사라지게 하고, 스타를 죽였다가 살리기도 하고, 영화인들을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일하게 하는 것도 결국 관객이다. 토레스가 유성영화 '재즈싱어'를 보고 영화라는 세계가 완전히 변할 거라고 얘기하는 건 그 작품에 관객이 열광했기 때문이었다. 콘래드가 자기 시대가 끝났다는 걸 안 것도 관객의 비웃음을 직접 목격한 뒤였다. 라로이의 마음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자기 연기를 조롱하는 관개의 목소리를 들은 뒤부터이지 않았나. 그리고 영화를 영원히 기억하는 것 또한 관객이다. 토레스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며 기어코 넬리를 떠올린다. 토레스가 그런 것처럼 관객은 각자의 인생을 영화에 대입해가며 영화를 불멸케 한다.


'바빌론'은 분명 '라라랜드'처럼 관객 대부분이 애정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과장된 연출 방식이, 긴 러닝 타임이, 중구난방으로 펼쳐지는 듯한 이야기가 맘에 들지 않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셔젤 감독의 영화를 향한 저 긴 고백을 보고 나면 결국 그 절절한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때 영화를 향해 "이건 저급한 예술이 아니다(This is not a low art)"고 외쳐댔던 콘래드의 대사는 마치 셔젤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 같기도 하다. '바빌론'은 지난해 말 미국에서 개봉해 153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 그치며 흥행에 처참히 실패했다(제작비 약 8000만 달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젤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게 되는 건 '바빌론'에서 보여준 영화를 향한 이 애증 때문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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