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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inNess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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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3일(현지시간)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거장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반세기 이상 미국 대중음악 신(scene)을 주름잡았다. 최근 핼러윈을 맞아 재차 조명된 미국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명반 '스릴러(Thriller)'(1982)를 비롯 셀 수 없는 명반과 히트곡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미국에서 영향력이 제일 강력한 흑인 대중음악가로 꼽혀온 고인은 1950년대 후반부터 대중문화 예술에서 흑인 뮤지션의 음악적·사회적 위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다.
존스는 트럼펫 연주자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미국 재즈 피아니스트 카운트 베이시 등의 빅 밴드를 위한 작곡, 편곡가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영화 음악 작곡가, 음반 프로듀서로 큰 공헌을 했지만 인력 네트워킹에도 탁월했다. 음반 제작 파트를 조직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고용하고, 검증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아울러 미국 라디오 주류 선곡 플레이리스트에 변화가 생기던 1979년과 1987년 사이에 잭슨을 위해 프로듀싱한 3장의 앨범 '스릴러', '오프 더 월(Off the Wall)', '배드(Bad)'가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깊은 호소력을 발휘하여 팝 산업을 재편했다.
존스는 1933년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서 지역 갱스터를 위해 일하던 목수 퀸시 시니어와 음악적 재능이 있는 보스턴 대학교 졸업생 사라 웰스 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모와 헤어지고 재혼한 부친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외롭고 가난하게 보낸 존스는 열한 살 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찾은 레크리에이션 센터의 감독관 방에서 스피넷 피아노(작은 피아노)를 발견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후 학교 밴드와 합창단에 가입해 금관악기, 리드악기, 타악기 등을 배웠고 음악이 그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그가 열네 살 때 서부로 이사 온 열여섯 살의 레이 찰스와 만나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존스는 1950년대 초반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 라이오넬 햄튼에서 트럼펫 연주자이자 편곡자로 활동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처음 제대로 완성한 완곡인 '킹피시(Kingfish)'도 이 시기에 만든 곡이다. 1950년대 후반엔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의 밴드에서 음악 감독, 편곡가, 트럼펫 연주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195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앨범 '디스 이즈 하우 필 어바웃 재즈(This Is How I Feel About Jazz)'를 녹음했다. 1958년 '머큐리 레코즈(Mercury Records)'와 계약했고 이듬해 빅밴드를 결성해 '더 그레이트 와이드 월드 오브 퀸시 존스(The Great Wide World of Quincy Jones)'를 내놓아 호평 받았다.
1960년엔 흑인 미국 작가 아르나 본템스(Arna Bontemps)와 카운티 컬린(Countee Cullen)의 작품을 기반으로 해럴드 알렌(Harold Arlen)과 조니 머서(Johnny Mercer)가 곡을 쓴, 노예제 폐지 이후의 남부를 다룬 뮤지컬 '프리 앤드 이지(Free and Easy)'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 재즈 밴드를 결성하는 일을 제안받기도 했다.
존스의 음악 경력은 이후에도 일사천리였다. 1962년 빅 밴드 편성으로 발표한 음반 '빅 밴드 보사노바'의 첫 번째 트랙 '솔 보사 노바(Soul Bossa Nova)'는 여러 힙합곡과 영화 '오스틴 파워' 테마곡을 비롯해 수백 번 샘플링되고 재사용됐다.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밴드를 이끌었고, 다이나 워싱턴의 '더 스윙잉 미스 '디'(The Swingin' Miss 'D')(1957), 베티 카터의 '미트 베티 카터 앤드 레이 브라이언트(Meet Betty Carter and Ray Bryant)'(1955), 레이 찰스의 '지니어스 + 솔 = 재즈(Genius + Soul = Jazz)'(1961)와 같은 풍성하고 자신감 넘치는 녹음을 편곡했다.
특히 프랭크 시내트라와 베이시의 여러 협업을 편곡하고 지휘했는데, 이중엔 시내트라의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시내트라 앳 더 샌즈(Sinatra at the Sands)'(1966)가 포함됐다.
존스는 또한 '전당포(The Pawnbroker)'(1964),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1967), '더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1985) 등 수많은 영화의 OST를 작곡했다. 그의 영화, 드라마 OST 작업은 20세기 클래식, 재즈, 펑크, 아프로쿠반 재즈(라틴 재즈 초기 형태), 스트리트, 스튜디오, 음악원 등의 요소를 다양하게 혼합했다.
1961년 머큐리에서 음악감독이 된 존스는 재즈 뮤지션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음악 흐름이 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재빠르게 간파했다. 그가 처음 성공시킨 팝가수는 레슬리 고어(Lesley Gore)였다. 특히 그는 '잇츠 마이 파티(It's My Party)'(1963)라는 곡을 고어의 1위 히트곡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존스는 머큐리에서 승승장구하며 백인 소유의 레코드 레이블에서 최초의 흑인 부사장이 되는 역사를 썼다. 또 베이시의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를 편곡하며 첫 그래미 상을 받았다.
존스의 진정한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됐다. '더 데드리 어페어(The Deadly Affair)', '인 더 하트 오브 더 나이트(In the Heat of the Night)', '더 겟어웨이(The Getaway)' 등 수십편의 영화 OST를 작곡했다. 빌 코스비가 출연한 쇼의 주제가와 에피소드도 작곡했다. 1973년엔 위대한 재즈 뮤지션 듀크 엘링턴에게 헌정하는 TV 프로그램 '듀크 엘링턴… 위 러브 유 메들리(Duke Ellington… We Love You Madly)'를 제작했다.
1974년 뇌동맥류를 앓아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첫 번째 수술 후, 그가 살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은 친구들이 로스앤젤레스(LA)의 슈라인 오디토리엄(Shrine Auditorium)에서 헌정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존스는 의사의 흥분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이 콘서트에 참석했다. 존스는 뒷날 당시 공연에 대해 "마치 제 장례식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건강을 되찾은 그는 브라더스 존슨의 히트곡을 프로듀싱했다. 1977년엔 유명 미니 시리즈 '루츠(Roots)' OST를 작곡했다. 국내 '뿌리'라는 제목으로 방송되기도 했던 이 시리즈는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상대로 자행한 핍박을 현실감 있게 그렸다. 특히 배우 레버 버튼이 연기한 주인공 '쿤타 킨테'의 애달픈 사연은 국내 시청자에게도 깊이 각인됐다. 존스는 에미상을 받은 이 작품으로, OST 음악 거장 입지를 굳혔다.
1978년 시드니 루멧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더 위즈(The Wiz)' 영화 버전의 음악 감독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잭슨과 함께 작업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의 합작 명반 '오프 더 월', '스릴러', '배드'의 음반 판매량은 수천만장에 달한다.
1980년 존스는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와 합작으로 자신의 레이블 '퀘스트(Qwest)'를 론칭했다. 이 레이블이 첫 번째로 선보인 아티스트는 가수 겸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으로 그는 '기브 미 더 나이트(Give Me the Night)'로 그래미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존스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했다. 잭슨과 시내트라를 비롯 레나 혼, 제임스 잉그램과 같은 스타뿐만 아니라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 가스펠 가수 안드레 크라우치, 실험적 재즈 색소포니스트 소니 시몬스도 그와 협업 상대였다.
존스의 위대한 업적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85년 'USA 포 아프리카(for Africa)'다. 자선 명곡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가 탄생한 대형 프로젝트다.
올해 초 공개된 글로벌 OTT 넷플릭스 음악 다큐멘터리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The Greatest Night in Pop)을 통해 재조명된 해당 프로젝트는 잭슨과 찰스를 비롯 라이오넬 리치, 스티비 원더,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신디 로퍼, 다이애나 로스, 티나 터너, 폴 사이먼, 빌리 조엘, 케니 로저스, 윌리 넬슨, 휴이 루이스 등 당대를 풍미한 팝 거물 뮤지션 40여명이 하룻밤 사이에 '위 아 더 월드'라는 대곡(大曲)을 녹음한 과정이다.
때는 거슬러 올라가 미국 3대 대중음악 시상식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A)가 끝난 1985년 1월28일 밤. 녹음 장소는 로스앤젤레스 도심의 녹음실인 A&M 스튜디오다. 스튜디오 앞엔 이런 문구가 걸렸다. '문 앞에 자존심은 두고 오세요.'(Check your ego at the door). 하지만 이 말로 내로라하는 뮤지션들 사이에 피어오르는 긴장감을 완전히 없애긴 힘들었다. 1인칭의 내면으로 흐르는 아티스트의 음악적 영감은 애초부터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더가 '위 아 더 월드'에 스와힐리어를 넣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대목이 그렇다. 이런 아티스트의 예민함은 영감의 알리바이다.
그래서 프로듀서 존스의 역할이 대단했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태도들을 현실로 끌어내리고 끝까지 설득하고 타협해 아프리카의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감상하는 노래가 아니라, 나름 투쟁하는 노래를 탄생시켰다. 모든 뮤지션이 받지 못하는 솔로 파트를 분배하는 것도 존스의 난감한 몫이었다.
'USA 포 아프리카' 프로젝트 이후 존스는 앨리스 워커의 소설 '더 컬러 퍼플'을 동명 영화로 각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준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또한 2개월도 채 걸리지 않아 음악을 작곡했다.
하지만 사생활로 난황을 겪었다. 결혼 생활이 거듭 실패했고, 그는 수면제인 할시온에 의존하게 됐다. 치료를 받던 존스는 1989년 앨범 '백 온 더 블록(Back on the Block)으로 복귀했다. 흑인 미국 음악에 대한 존중을 담은 이 앨범엔 엘라 피츠제럴드, 마일스 데이비스, 루더 밴드로스 등이 참여했고 '올해의 앨범'을 포함 그래미상 6개를 수상했다. 존스는 올해의 비클래식 프로듀서가 됐다.
1990년 존스의 레코드 레이블은 더 큰 멀티미디어 기업인 '퀸시 존스 엔터테인먼트(Quincy Jones Entertainment)' 일부가 됐다. 존스의 경력은 202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2017년 재즈 콘서트와 다큐멘터리의 고화질 스트리밍을 제공하는 비디오 플랫폼 퀘스트 TV를 출시하는데 일조했다. 2022년엔 더 위켄드(The Weeknd)'의 앨범 '던 에프엠(Dawn FM)'에 실린 트랙 '어 테일 바이 퀸시(A Tale by Quincy)'에 참여하기도 했다.
존스는 또한 미국 최고 귀원의 대중음악 시상식 '그래미 어워즈'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다. 80번 후보에 올랐다. 28번 수상했다. 미국 팝 슈퍼스타 비욘세의 32회 수상이 가장 많은 기록이다. 헝가리 태생의 세계적인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가 31번 수상으로 2위다.
존스는 음악적 공로를 인정 받아 하버드, 프린스턴, 줄리어드, 뉴잉글랜드 음악원, 버클리 음악 대학 등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내셔널 메달 오브 아츠(National Medal of Arts)'와 '내셔널 인다우먼트 포 더 아츠 재즈 마스터(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Jazz Master)' 펠로우십을 받았다.
존스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대형 프로젝트를 대거 남겼다. 미국 가수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에 대한 뮤지컬, 아프리카 뿌리에서 흑인 미국 음악의 역사를 다룬 '태양의 서커스' 쇼, 브라질 카니발에 대한 영화, 미국 유명 흑인 작가 랄프 엘리슨의 미완성 소설 '준티스(Juneteenth)'의 영화 버전, 아프리카계라고 알려진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삶에 대한 영화 등이 있다.
국내에도 존스를 존경하는 마니아들이 많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과도 친분이 두터운 그는 친한파다. 2013년 CJ E&M 음악공연사업부문의 초청으로 내한, 다양한 한국 문화를 경험했다.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을 위한 헌정 공연에도 참여했다. 그해 CJ문화재단과 손잡고 버클리 음대의 CJ대중음악장학생 중 존스가 우수한 학생을 직접 선발해 표창하는 '퀸시 존스 장학금'을 운영하기도 했다.
2016년 CJ ENM이 홍콩에서 펼친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현 마마(MAMA) 어워즈)의 전문부문 '가치공로상' 수상을 위해 참석하기도 했다. 이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크리에이터스 포럼'에도 함께 했다.
임희윤 음악평론가는 존스에 대해 "재즈 연주자, 재즈 편곡자로 시작했지만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넓은 스펙트럼의 재능을 활용해 팝 음악의 품질을 높인 숨은 주역"이라면서 "프랭크 시내트라부터 마이클 잭슨까지 시대별 팝의 제왕들과 함께 한 전방위 프로듀서"라고 기억했다.
특히 잭슨과 협업에 대해선 "1981년 MTV 개국에 즈음해 최고의 비주얼 아티스트로 떠오른 마이클 잭슨을 청각적 콘텐츠 퀄리티의 측면에서, 즉 '음악 앨범' 아티스트로서도 최고 반열에 올려놓은 혁혁한 공을 세운 주인공"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존스가 자신의 앨범에서도 재즈부터 브라질리언 뮤직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점을 특기했다. 임 평론가는 "'백 온 더 블록'(1989) 같은 앨범에서는 당시 첨단 장르였던 뉴 잭 스윙까지 선보였던 힙스터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미국에서 영향력이 제일 강력한 흑인 대중음악가로 꼽혀온 고인은 1950년대 후반부터 대중문화 예술에서 흑인 뮤지션의 음악적·사회적 위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다.
존스는 트럼펫 연주자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미국 재즈 피아니스트 카운트 베이시 등의 빅 밴드를 위한 작곡, 편곡가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영화 음악 작곡가, 음반 프로듀서로 큰 공헌을 했지만 인력 네트워킹에도 탁월했다. 음반 제작 파트를 조직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고용하고, 검증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아울러 미국 라디오 주류 선곡 플레이리스트에 변화가 생기던 1979년과 1987년 사이에 잭슨을 위해 프로듀싱한 3장의 앨범 '스릴러', '오프 더 월(Off the Wall)', '배드(Bad)'가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깊은 호소력을 발휘하여 팝 산업을 재편했다.
존스는 1933년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서 지역 갱스터를 위해 일하던 목수 퀸시 시니어와 음악적 재능이 있는 보스턴 대학교 졸업생 사라 웰스 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모와 헤어지고 재혼한 부친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외롭고 가난하게 보낸 존스는 열한 살 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찾은 레크리에이션 센터의 감독관 방에서 스피넷 피아노(작은 피아노)를 발견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후 학교 밴드와 합창단에 가입해 금관악기, 리드악기, 타악기 등을 배웠고 음악이 그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그가 열네 살 때 서부로 이사 온 열여섯 살의 레이 찰스와 만나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존스는 1950년대 초반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 라이오넬 햄튼에서 트럼펫 연주자이자 편곡자로 활동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처음 제대로 완성한 완곡인 '킹피시(Kingfish)'도 이 시기에 만든 곡이다. 1950년대 후반엔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의 밴드에서 음악 감독, 편곡가, 트럼펫 연주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195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앨범 '디스 이즈 하우 필 어바웃 재즈(This Is How I Feel About Jazz)'를 녹음했다. 1958년 '머큐리 레코즈(Mercury Records)'와 계약했고 이듬해 빅밴드를 결성해 '더 그레이트 와이드 월드 오브 퀸시 존스(The Great Wide World of Quincy Jones)'를 내놓아 호평 받았다.
1960년엔 흑인 미국 작가 아르나 본템스(Arna Bontemps)와 카운티 컬린(Countee Cullen)의 작품을 기반으로 해럴드 알렌(Harold Arlen)과 조니 머서(Johnny Mercer)가 곡을 쓴, 노예제 폐지 이후의 남부를 다룬 뮤지컬 '프리 앤드 이지(Free and Easy)'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 재즈 밴드를 결성하는 일을 제안받기도 했다.
존스의 음악 경력은 이후에도 일사천리였다. 1962년 빅 밴드 편성으로 발표한 음반 '빅 밴드 보사노바'의 첫 번째 트랙 '솔 보사 노바(Soul Bossa Nova)'는 여러 힙합곡과 영화 '오스틴 파워' 테마곡을 비롯해 수백 번 샘플링되고 재사용됐다.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밴드를 이끌었고, 다이나 워싱턴의 '더 스윙잉 미스 '디'(The Swingin' Miss 'D')(1957), 베티 카터의 '미트 베티 카터 앤드 레이 브라이언트(Meet Betty Carter and Ray Bryant)'(1955), 레이 찰스의 '지니어스 + 솔 = 재즈(Genius + Soul = Jazz)'(1961)와 같은 풍성하고 자신감 넘치는 녹음을 편곡했다.
특히 프랭크 시내트라와 베이시의 여러 협업을 편곡하고 지휘했는데, 이중엔 시내트라의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시내트라 앳 더 샌즈(Sinatra at the Sands)'(1966)가 포함됐다.
존스는 또한 '전당포(The Pawnbroker)'(1964),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1967), '더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1985) 등 수많은 영화의 OST를 작곡했다. 그의 영화, 드라마 OST 작업은 20세기 클래식, 재즈, 펑크, 아프로쿠반 재즈(라틴 재즈 초기 형태), 스트리트, 스튜디오, 음악원 등의 요소를 다양하게 혼합했다.
1961년 머큐리에서 음악감독이 된 존스는 재즈 뮤지션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음악 흐름이 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재빠르게 간파했다. 그가 처음 성공시킨 팝가수는 레슬리 고어(Lesley Gore)였다. 특히 그는 '잇츠 마이 파티(It's My Party)'(1963)라는 곡을 고어의 1위 히트곡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존스는 머큐리에서 승승장구하며 백인 소유의 레코드 레이블에서 최초의 흑인 부사장이 되는 역사를 썼다. 또 베이시의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를 편곡하며 첫 그래미 상을 받았다.
존스의 진정한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됐다. '더 데드리 어페어(The Deadly Affair)', '인 더 하트 오브 더 나이트(In the Heat of the Night)', '더 겟어웨이(The Getaway)' 등 수십편의 영화 OST를 작곡했다. 빌 코스비가 출연한 쇼의 주제가와 에피소드도 작곡했다. 1973년엔 위대한 재즈 뮤지션 듀크 엘링턴에게 헌정하는 TV 프로그램 '듀크 엘링턴… 위 러브 유 메들리(Duke Ellington… We Love You Madly)'를 제작했다.
1974년 뇌동맥류를 앓아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첫 번째 수술 후, 그가 살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은 친구들이 로스앤젤레스(LA)의 슈라인 오디토리엄(Shrine Auditorium)에서 헌정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존스는 의사의 흥분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이 콘서트에 참석했다. 존스는 뒷날 당시 공연에 대해 "마치 제 장례식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건강을 되찾은 그는 브라더스 존슨의 히트곡을 프로듀싱했다. 1977년엔 유명 미니 시리즈 '루츠(Roots)' OST를 작곡했다. 국내 '뿌리'라는 제목으로 방송되기도 했던 이 시리즈는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상대로 자행한 핍박을 현실감 있게 그렸다. 특히 배우 레버 버튼이 연기한 주인공 '쿤타 킨테'의 애달픈 사연은 국내 시청자에게도 깊이 각인됐다. 존스는 에미상을 받은 이 작품으로, OST 음악 거장 입지를 굳혔다.
1978년 시드니 루멧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더 위즈(The Wiz)' 영화 버전의 음악 감독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잭슨과 함께 작업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의 합작 명반 '오프 더 월', '스릴러', '배드'의 음반 판매량은 수천만장에 달한다.
1980년 존스는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와 합작으로 자신의 레이블 '퀘스트(Qwest)'를 론칭했다. 이 레이블이 첫 번째로 선보인 아티스트는 가수 겸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으로 그는 '기브 미 더 나이트(Give Me the Night)'로 그래미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존스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했다. 잭슨과 시내트라를 비롯 레나 혼, 제임스 잉그램과 같은 스타뿐만 아니라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 가스펠 가수 안드레 크라우치, 실험적 재즈 색소포니스트 소니 시몬스도 그와 협업 상대였다.
존스의 위대한 업적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85년 'USA 포 아프리카(for Africa)'다. 자선 명곡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가 탄생한 대형 프로젝트다.
올해 초 공개된 글로벌 OTT 넷플릭스 음악 다큐멘터리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The Greatest Night in Pop)을 통해 재조명된 해당 프로젝트는 잭슨과 찰스를 비롯 라이오넬 리치, 스티비 원더,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신디 로퍼, 다이애나 로스, 티나 터너, 폴 사이먼, 빌리 조엘, 케니 로저스, 윌리 넬슨, 휴이 루이스 등 당대를 풍미한 팝 거물 뮤지션 40여명이 하룻밤 사이에 '위 아 더 월드'라는 대곡(大曲)을 녹음한 과정이다.
때는 거슬러 올라가 미국 3대 대중음악 시상식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A)가 끝난 1985년 1월28일 밤. 녹음 장소는 로스앤젤레스 도심의 녹음실인 A&M 스튜디오다. 스튜디오 앞엔 이런 문구가 걸렸다. '문 앞에 자존심은 두고 오세요.'(Check your ego at the door). 하지만 이 말로 내로라하는 뮤지션들 사이에 피어오르는 긴장감을 완전히 없애긴 힘들었다. 1인칭의 내면으로 흐르는 아티스트의 음악적 영감은 애초부터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더가 '위 아 더 월드'에 스와힐리어를 넣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대목이 그렇다. 이런 아티스트의 예민함은 영감의 알리바이다.
그래서 프로듀서 존스의 역할이 대단했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태도들을 현실로 끌어내리고 끝까지 설득하고 타협해 아프리카의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감상하는 노래가 아니라, 나름 투쟁하는 노래를 탄생시켰다. 모든 뮤지션이 받지 못하는 솔로 파트를 분배하는 것도 존스의 난감한 몫이었다.
'USA 포 아프리카' 프로젝트 이후 존스는 앨리스 워커의 소설 '더 컬러 퍼플'을 동명 영화로 각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준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또한 2개월도 채 걸리지 않아 음악을 작곡했다.
하지만 사생활로 난황을 겪었다. 결혼 생활이 거듭 실패했고, 그는 수면제인 할시온에 의존하게 됐다. 치료를 받던 존스는 1989년 앨범 '백 온 더 블록(Back on the Block)으로 복귀했다. 흑인 미국 음악에 대한 존중을 담은 이 앨범엔 엘라 피츠제럴드, 마일스 데이비스, 루더 밴드로스 등이 참여했고 '올해의 앨범'을 포함 그래미상 6개를 수상했다. 존스는 올해의 비클래식 프로듀서가 됐다.
1990년 존스의 레코드 레이블은 더 큰 멀티미디어 기업인 '퀸시 존스 엔터테인먼트(Quincy Jones Entertainment)' 일부가 됐다. 존스의 경력은 202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2017년 재즈 콘서트와 다큐멘터리의 고화질 스트리밍을 제공하는 비디오 플랫폼 퀘스트 TV를 출시하는데 일조했다. 2022년엔 더 위켄드(The Weeknd)'의 앨범 '던 에프엠(Dawn FM)'에 실린 트랙 '어 테일 바이 퀸시(A Tale by Quincy)'에 참여하기도 했다.
존스는 또한 미국 최고 귀원의 대중음악 시상식 '그래미 어워즈'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다. 80번 후보에 올랐다. 28번 수상했다. 미국 팝 슈퍼스타 비욘세의 32회 수상이 가장 많은 기록이다. 헝가리 태생의 세계적인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가 31번 수상으로 2위다.
존스는 음악적 공로를 인정 받아 하버드, 프린스턴, 줄리어드, 뉴잉글랜드 음악원, 버클리 음악 대학 등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내셔널 메달 오브 아츠(National Medal of Arts)'와 '내셔널 인다우먼트 포 더 아츠 재즈 마스터(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Jazz Master)' 펠로우십을 받았다.
존스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대형 프로젝트를 대거 남겼다. 미국 가수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에 대한 뮤지컬, 아프리카 뿌리에서 흑인 미국 음악의 역사를 다룬 '태양의 서커스' 쇼, 브라질 카니발에 대한 영화, 미국 유명 흑인 작가 랄프 엘리슨의 미완성 소설 '준티스(Juneteenth)'의 영화 버전, 아프리카계라고 알려진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삶에 대한 영화 등이 있다.
국내에도 존스를 존경하는 마니아들이 많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과도 친분이 두터운 그는 친한파다. 2013년 CJ E&M 음악공연사업부문의 초청으로 내한, 다양한 한국 문화를 경험했다.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을 위한 헌정 공연에도 참여했다. 그해 CJ문화재단과 손잡고 버클리 음대의 CJ대중음악장학생 중 존스가 우수한 학생을 직접 선발해 표창하는 '퀸시 존스 장학금'을 운영하기도 했다.
2016년 CJ ENM이 홍콩에서 펼친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현 마마(MAMA) 어워즈)의 전문부문 '가치공로상' 수상을 위해 참석하기도 했다. 이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크리에이터스 포럼'에도 함께 했다.
임희윤 음악평론가는 존스에 대해 "재즈 연주자, 재즈 편곡자로 시작했지만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넓은 스펙트럼의 재능을 활용해 팝 음악의 품질을 높인 숨은 주역"이라면서 "프랭크 시내트라부터 마이클 잭슨까지 시대별 팝의 제왕들과 함께 한 전방위 프로듀서"라고 기억했다.
특히 잭슨과 협업에 대해선 "1981년 MTV 개국에 즈음해 최고의 비주얼 아티스트로 떠오른 마이클 잭슨을 청각적 콘텐츠 퀄리티의 측면에서, 즉 '음악 앨범' 아티스트로서도 최고 반열에 올려놓은 혁혁한 공을 세운 주인공"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존스가 자신의 앨범에서도 재즈부터 브라질리언 뮤직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점을 특기했다. 임 평론가는 "'백 온 더 블록'(1989) 같은 앨범에서는 당시 첨단 장르였던 뉴 잭 스윙까지 선보였던 힙스터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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