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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ggoorr.net/thisthat/10502933




서론


1894~1895년 연간의 청일전쟁은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단번에 깨뜨려놓은 사건이었습니다. 구미 열강들이 여러 차례 청을 대내외적으로 압박하고, 청의 중심 질서를 흔들어오고는 있었지만 어떻게든 유지는 되고 있었습니다. 결과가 어찌 됐든 청은 베트남이나 조선 등의 방면에서 자신의 종주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써왔죠. 이런 구도를 깨뜨리려고 나서게 된 것은 영국도, 러시아도 아닌 일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의 경우 일본이 한국의 본격적인 식민지화를 시도하는 단초가 되기 때문에 한국사에서도 많이 언급이 되는 편인데, 대개 청일간의 경제적 갈등, 혼란스러운 조선 정세로 촉발된 것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일본의 대청 개전은 소극적인 것, 안(못)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구요. 본문에서는 청일전쟁기 일본의 지도자 세 명과 관련 분야를 중심으로 청일전쟁이 일본에 갖는 의미와 그 필연성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번벌 정치의 위기

(이토 히로부미. 근대 일본의 국가 체제와 헌법 등을 기초한 정치가였다.)


번벌(藩閥)은 메이지 유신 이래로 덴노(天皇)의 후견 아래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정치 세력입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다만 번벌은 통일된 정치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제국으로서의 일본을 만드는 데에는 대개 공감했지만 세부적인 정치관 등의 면에서는 많은 내부 갈등을 빚어온 것이 번벌이었습니다. 앞서 언급된 이토와 야마가타도 번벌의 쌍벽을 이루는 동시에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이 때문에 번벌은 구 정권 세력, 보수파들과의 갈등은 물론 세력 내부의 갈등도 여러 차례 겪어왔고 정권 기반이 많이 취약했습니다. 더욱이 1889~1890년에 이뤄진 헌법과 의회의 성립은 민권(民權) 향상을 요구하는 반번벌 세력의 정계 진출을 촉진하며 그 기반을 더욱 흔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일례로 의회에서 덴노의 행위가 위헌이라고 문제삼은 적도 있었습니다. 발단은 오자와 다케오(小沢武雄) 중장이 의회에서 국방의 미비점에 대해 발언한 것을 두고 군에서 '기밀 누설'이라며 분개한 것입니다. 메이지 덴노는 그를 의원면관(≒ 권고사직) 조치하도록 했는데, 의회에서는 이를 위헌이라 보고 덴노에게 그러한 조치가 위헌임을 밝히는 내용의 상주안을 제출할 것을 논의했으나 부결(찬성 45, 반대 83)됐습니다. 표결 단계에서 부결되면서 해프닝에 그쳤지만 당시 덴노, 그와 정치적 유착 관계에 있는 번벌이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했음을 시사합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예산 문제였습니다. 헌법에 따르면 예산안은 의회의 승인을 받게 되어있었는데, 의회에서 반번벌 세력(이하 민권파)의 우세가 지속되면서 내각의 예산안은 계속 삭감을 반복했습니다. 당시 번벌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예산안을 계속 늘리고 싶어했고, 민권파는 민력휴양(民力休養). 즉 민간 경제에 대한 부담 축소 입장을 견지하며 지속적으로 이를 삭감했습니다. 민권파는 또한 번벌 측의 제국주의 노선을 효용성의 측면에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여지껏 들어간 돈이 얼만데 결과가 없느냐.'는 식이었죠. 번벌 내각은 연설을 통한 설득, 의회 해산, 선거 간섭 등을 통해 이러한 정국을 타개해나가려 했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1893년의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이르면 덴노로부터의 중재를 얻어냄으로써 그때 그때의 어려움을 돌파해나가는, 덴노의 권위에 의지하여 정국을 근근히 풀어나가는 모습까지 보여주게 됩니다. 결국 내각은 이러한 상황을 일거에 돌파할만한 방법을 찾게 됩니다. 국가주의를 고취하고, 제국주의 노선의 효용성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 전쟁이었습니다.




무쓰 무네미쓰와 일본의 외교적 지위

(무쓰 무네미쓰. 일본의 외무대신이었으며 대청 개전론을 주장했다.)


1880년대 당시의 일본은 개항 과정에서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이 지속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번벌은 이를 개정하기 위해 서구 열강들과의 교섭을 지속적으로 시도했습니다. 일본측의 협상안은 외국인 재판관의 임명과 법전 편찬이었습니다. 그러나 번벌 내부에서의 입장 차이, 회의적인 여론, 결정적으로 교섭 자체가 결렬되면서 실패하게 됩니다. 또한 일본 헌법에서 외국인의 일본 문무관 임용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전자는 불가능했습니다. 차선책은 외국인 재판관을 귀화시켜 임명하는 것이었는데, 이전에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외무대신이 '외국인' 재판관 임명을 보증해놓은 상태였는데 외국인을 귀화시킨다면 그 약속에 부합하는 것이냐는 논란이 생기며 이 역시도 무산됐습니다.이런 배경을 뒤로 하고, 1893~1894년에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陸奧 宗光)는 "우리나라의 진보, 개화가 진정으로 아시아 가운데 특수하게 문명이 강력한 나라라는 실증을 외국에 알게 함"으로써 조약 개정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고, 이는 일본의 문명성을 대외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사건을 요하게 됩니다.


한편 일본의 조약개정 움직임과는 별개로, 국제법 영역에서도 청과의 대결이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자체적인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나, 조약 개정을 위한 유럽식 근대 법 체계 도입의 차원에서나 법적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청과 상호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일본은 법의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인데 청은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의문이었습니다. 서로 치외법권을 폐지한다면 재청(在淸) 일본인들을 청의 전근대 사법체계에 방기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거나, 청으로부터 일방적 치외법권을 인정받는 선택지만이 남는데 이것들은 외교적인 방법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과 외정(外征)이 가능한 군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근대 일본군의 모델을 제시하고 실현한 주역이었다.)


상술한 내용에서는 2명의 인물이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이 적은 편입니다. 약 2, 30여 년에 이르는 일국의 정치외교사가 서술되고 있는데 거기서 한 인물의 비중이 크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 챕터에서 비중이 매우 클 예정입니다. 실제로 야마가타가 이 시기 일본의 군사 영역에서 갖는 비중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야마가타는 1870~1880년대 연간에 참모본부의 독립, 독일식 군제 도입, 육군대학교 설립 등 근대 일본군의 뼈대를 짠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야마가타가 제시한 일본의 대전략 개념으로 '이익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을 주권선이라 한다면, 그 주권을 유지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익선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애치슨 라인이나 중국의 도련선 같은 개념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야마가타가 생각한 당대 일본의 이익선은 한반도였습니다. 한반도를 확보함으로써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와 한반도의 항구를 연결하는 것을 막고, 일본의 주권선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야마가타는 이익선 개념을 제시한 데에서 알 수 있듯, 열강으로서의 일본을 지향했고 이에 맞는 군을 갖길 원했습니다. 당시 일본 군부는 국토 방위,고정적인 방어에 중점을 두는 교리를 지지했던 프랑스파와 기동적으로 방어와 공격을 전환할 수 있는 교리를 지지한 독일파가 있었는데 야마가타는 후자였습니다. 야마가타는 군 조직 개편을 통해 프랑스파가 군에 대한 검열권과 인사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든 다음,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우군인 오야마 이와오(大山 巌) 당시 육군대신에게 넘겨줌으로써 자신의 군 통제권을 명확히 하고 독일식 군 건설에 착수합니다. 이는 임오군란, 갑신정변과 같은 청나라와의 무력 충돌과 맞물리면서 일본군의 급속 확장을 가능케하였고, 대외 전쟁이 가능한 군대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군의 동향은 상술한 톱니바퀴들과 완벽하게 맞아돌아가면서 청일전쟁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됩니다.



결론


청일전쟁은 당시 일본이 갖고 있는 모든 모순들을 일거에 깨뜨릴 수 있는 하나의 돌파구였습니다. 정치, 외교, 군사의 지도자 및 실무자들은 전쟁을 통해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기를 원했습니다. 민중들도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거치며 조선과 청에 대한 반감이 고조된 상태였고, 민권파는 예산을 삭감했다고는 하나 개전을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민권파는 번벌을 비판하면서도 국가주의, 제국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자신들의 식민지 이권을 위해서 전쟁을 찬동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각 집단의 이해관계와 목적의식이 다 맞아떨어지면서 일본은 청일전쟁에 범국가적인 전쟁 수행 의지를 보여주었고, 이로써 제국주의 국가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전이라는 목표에만 몰두한 나머지 전후 구상에 있어서는 맹점을 보여주면서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으로 인해 자신들이 쌓아올린 금자탑을 모래성으로 만드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청일전쟁은 안 일어날 수 있었던, 우발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일본의 범국가적인 제국주의 사조의 성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터졌을 것이라는 게 짧은 소견입니다.




출처: 네이버 부흥 카페 니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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