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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까지 의사였다.

 

그리 부자가 아닌 집에서 태어났다.

 

과외는 못했지만 죽도록 공부해서 의대에 왔고 학자금대출로 학업을 마쳤다.

 

남보다 체력이 좋아서 밤새고 오래 일하는 과를 선택했지만 그래도 아기들 보면서 일하는 게 참 좋았다.

 

​소위 기피과를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정말 살려보는 과여서 10년동안 최선을 다했다.

 

후회는 없다.

 

​코로나가 터지고 2일에 한번 공문이 쉴새없이 왔다.

 

처음에는 우한에서 온 사람만 검사를 해준다 했다.

 

중국에서 오는 모든이들을 해야한다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외국인 입국을 막고 조금이라도 감염을 막아야 한다 했지만 나같은 일개의사의 생각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코로나 키트가 풀렸다고 언론에서 났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야 각 병원에 키트가 세팅이 되었다.

 

열나는 환자들은 검사할수 없었다.

 

보건소에서는 신천지가 아니면 검사가 불가하다 한다. 차라리 이 환자가 신천지랑 잡촉했다고 말해야하나 많이 고민했다.

 

마스크나 방호복은 구할 수 없었다.

 

직원들이 키친타월을 덴탈마스크 안에 대고 쓰는걸 보고 안산의 마스크공장가를 돌았다.

 

계약을 했으나 정부에서 반출을 막기 전날 현금을 들고왔다던 중국인에게 빼앗겼다.

 

속옷 10장을 가지고 당직실로 돌아와 아이와 영상통화를 하며 지냈다.

 

방송에 나오신 유명한 감염 교수는 국경을 막을 필요 없다 했다.

 

그분의 병원으로 아기를 전원하고 싶었으나

 

중국인 산모의 아기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국경은 열었으나 본인 병원은 닫았던 아이러니.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방송에 나온다.

 

​중환자실 환자에게 약을 쓰지만 50만원짜리 약을 써도 나라에서는 50만원을 준다.

 

장갑 수액라인 등 부재료는 나라에서 주지 않는다.

 

나는 공짜이다.

 

밤을 새서 중환자실을 지키지만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가장 적자 내는 의사이다.

 

많은 당직 수시로 울려대는 전화, 전공의와 다름없이 살지만 이미 40에 가까운 나이이다.

 

그러나 나는 병원에서 가장 돈 못 벌고 밤 많이 새는 의사이다.

 

​나와 같은 전공을 한 사람들은 일할 곳이 없어 레이저를 잡는다.

 

신생아중환자실은 없어진 곳이 더 많아졌다.

 

누구보다 간담도 수술을 열심히 하던 당찼던 외과의는,

 

간담도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없어 가슴성형을 하러 떠났다.

 

그가 밤을 새고 배웠던 그 기술과 지식은 중증수술을 하는 병원이 없어 펼칠 곳을 잃었다.

 

​외래에는 중국인 환자가 3개월 보험료를 내고 1000만원이 넘는 약을 건강보험으로 타간다.

 

중국에 갔다가 일년 후 다시 약을 타러 오겠다며.

 

그러나 나는 환자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

 

그가 우리 재정을 좀먹고 있음을 알아도 나는 그럴 권리를 나라로부터 받지 못했다.

 

제주의 한 동료는 삭감을 감당하다 결국 일산화질소 치료를 포기했다.

 

제주도에 단 한대였던 그 기계를 포기한 후 한달후 그로 인해 한 아기가 헬기를 타고 서울로 가야 했다.

 

살았을까 그 아이는.

 

그 치료에 수억의 삭감을 물리던 심평원은 그 아기의 헐떡거림을 모를 것이다.

 

본인들이 어떤 결정을 한 건지 알고는 있을까.

 

사직서를 내고,

 

드디어 잠을 편안하게 자본다.

 

내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 몰라도 가슴이 쿵쾅대지 않는다.

 

내 환자를 계속 보고싶지만 우리중환자실은 문을 닫을 것이다

 

운영할수록 손해인 이곳을 더 해달라 말도 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병원에서 신생아중환자실과 중환자실을 포기했는지.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음압 병동이 없어 코로나 환자를 집으로 보내야 했는지.

 

왜 이런 곳에 쓸 돈은 없고 10년뒤의 공공의전만 중요한지.

 

흉부외과 동료가 심장수술을 할 병원이 없어 정맥류 전문개업을 해야 할 때 당당하고 듬직했던 그들이 얼마나 작아 보였는지.

 

나의 이름은 계속 바뀐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코로나 전사가 되었다가 공공재가 되었다.

 

나는 누군가처럼 대단한 아비를 두지 못해 쉽게 의사가 되지도 1.1의 학점으로 의대를 졸업하지도 못했으나 후회 없이 일했다.

 

공공재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의사로서, 또 직업인으로서 오늘은 정말.. 정말 깊은 잠을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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