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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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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조선 세종 때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인 '집현전'을 현대 서울에 되살리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서울혁신파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희망을 놓지 못한 이들이 아직 현장에 일부 남아 있지만 변하는 정세와 지역 주민들의 개발 욕구를 극복하기에는 어려움이 커 보인다.

27일 서울시 등에 따르면,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서울혁신파크는 옛 국립보건원과 질병관리본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보건 관련 국책 기관이 수십년 간 있었던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960년부터 2010년까지 50년 간 각종 질병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가 이뤄지던 곳으로 은평구 지역 주민의 발길이 뜸했다.

국책기관 지방 이전 계획에 따라 질병관리본부를 비롯한 기관들은 2010년 말 충북 청주에 있는 오송보건의료행정타운으로 떠났다. 그러자 당시 오세훈 시장이 이끌던 서울시는 서북권에 필요한 시설을 공급하겠다며 2009년 이 부지를 매입했다. 불광역 바로 옆 축구장 15개 크기에 맞먹는 금싸라기 땅인 이곳은 시유지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오 시장은 이 구역을 '세대공감형 웰빙경제문화타운'으로 복합 개발해 불광 역세권 일대를 지역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고 40층 이상 랜드마크 빌딩을 세워 호텔과 사무실, 전시시설을 유치하고 당시 기준으로 은평구 전체 업무 시설 고용 인원의 10%에 달하는 7900명을 고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오 시장은 2011년 공사를 시작해 2014년까지는 사업을 완료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런데 2011년 오 시장이 낙마하면서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이후 보궐선거에서 고(故)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면서 이 땅의 운명이 바뀌었다.

박 시장은 이곳에 서울혁신파크를 조성했다. 대기업이 아닌 시민사회단체와 예술단체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시민사회단체에 사회 문제를 해결할 실험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취지였다. 서울혁신파크는 기업과 공무원 대신 시민사회단체에 시정 주도권을 준 박원순 시대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2015년 서울혁신파크가 문을 열자 질병관리본부 이전 후 비어있던 30여개 건물에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청년일자리허브, 마을공동체지원센터, 인생이모작지원센터 등이 차례로 입주했다. 청년, 마을공동체, 사회적경제를 주제로 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현대판 집현전'이 되는 게 서울혁신파크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당시 박 시장은 "서울혁신파크는 세계 최초의 '혁신 집적 단지'로 도시의 난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만들어 갈 21세기 집현전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서울혁신파크를 주도한 전효관 서울혁신기획관도 "서울혁신파크는 서울이 가지고 있는 도시 문제를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하는 도시 실험실이자 그런 경험들이 모여 만드는 집단지성의 활동 공간으로 서울의 집현전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서울혁신파크에 입주한 청년, 시니어, 사회적경제, 협동조합, 마을공동체 등 관련 200여개 단체는 저렴한 사용료와 관리비를 발판 삼아 활동을 이어갔다.

성과도 있었다. 스타트업 업체들을 비롯해 청년일자리허브·마을공동체지원센터·협동조합지원센터, 목공을 배우고 제작·수리할 수 있는 나무공방, 중장년층을 위한 50+서부캠퍼스 등이 나름의 작업을 이어갔다.

야외 녹지공간과 개성 있는 카페와 책방, 야외 갤러리, 제로 웨이스트(Zero-Waste) 가게, 자전거 공방, 서울기록원과 도서관 등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휴식을 제공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서울혁신파크가 10년 간 일부 단체에 의해 저밀도로 이용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부지의 잠재력에 걸맞은 거점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20년 박 시장이 사망하고 전 기획관이 청와대 문화기획관으로 떠나면서 서울혁신파크는 동력을 잃었다. 한때 250개까지 증가했던 입주 단체 수는 150여개 안팎까지 줄어들었다.

이후 오 시장이 2021년 보궐선거를 통해 서울시로 복귀하면서 서울혁신파크는 격동의 시대를 맞게 됐다.

돌아온 오 시장은 2022년 12월 "서울시가 소유한 최대 규모의 가용지이지만 지난 10년 간 폐쇄적으로 이용되며 활용도가 떨어졌다"는 평가를 내리며, "서울혁신파크를 서울 서북권 발전을 견인할 신(新) 경제생활문화 중심으로 재탄생시키겠다"고 선언했다.

GTX-A 개통과 대규모 재개발 사업(약 9000세대 규모) 등 급격한 변화로 달라진 은평구의 위상에 맞춰 '직(職, 일자리)·주(住, 주거)·락(樂, 상업·여가·문화) 융복합도시'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오 시장은 2030년까지 서울혁신파크 부지에 삼성동 코엑스(46만㎡)와 맞먹는 총면적 약 50만㎡ 규모 시설을 조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지 중앙에는 대규모 녹지를 품은 중앙광장과 60층 높이의 랜드마크 건물이 들어서고 큰길가에는 여의도 '더현대서울'보다 큰 대규모 복합문화쇼핑몰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주거·의료·편의시설이 갖춰진 다양한 가족형태를 아우르는 공공형 주거단지 '골드빌리지'를 비롯해 총 800세대 규모의 새로운 형태의 주거단지를 조성하겠다는 구상도 발표됐다. 주거시설과 연계해 서울형키즈카페, 어르신 복지시설, 반려동물 공원 등 여가문화시설도 약속했다.

이후 계획은 더 구체화됐다. 2022년 역대 최초로 4선 서울시장이 된 오 시장은 지난달 26일 '일자리 중심 경제도시 강북' 조성을 목표로 하는 권역별 도시대개조 프로젝트 2탄 '강북권 대개조-강북 전성시대'를 발표하며 서울혁신파크 부지에 미디어 콘텐츠와 연구개발(R&D) 등 서울의 미래경제를 이끌어 나갈 융복합 창조산업 클러스터 '서울창조타운'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지역 주민의 개발 요구를 받아들이는 한편 산업·경제 일자리 확충을 통해 지역의 신성장 거점을 육성하겠다는 취지였다. 오 시장은 올해 사업화 방안을 마련하고 기업 설명회를 연 뒤 지구단위계획 수립 절차를 밟겠다고 예고했다.

이처럼 개발 계획이 연이어 발표되면서 사실상 서울혁신파크 운영이 종료됐고 입주 단체들은 차례로 떠났다. 지난해 1월 120개였던 입주 단체들은 계약 기간 만료로 인해 다른 장소로 이전했다. 대부분의 단체들이 떠나면서 같은 해 11월 9개 단체가 남았고 12월에는 5개만 자리를 지켰다. 이달 현재 남아 있는 단체는 단 3개다.

입주 단체 대부분은 저마다 사정이 있었음에도 입주 협약 기간 만료에 맞춰 퇴거했지만 3개 단체는 현장에 남아 있다.

이들 3개 단체는 서울혁신파크 운영 중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가 현장을 찾아가 면담까지 하고 있지만 이들은 점유를 이어가며 퇴거를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오 시장이 발표한 상업 개발 계획에 반대하며 서울혁신파크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공간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공감한 100여개 진보 성향 시민사회단체가 합류했다. 이들은 녹지 파괴로 인한 환경 문제와 교통 체증 등을 고려하면 개발을 통해 얻을 실익이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시의 거듭된 퇴거 요구에도 3개 단체가 혁신파크 내 공간을 점유하는 대치 상황이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3개 단체가 스스로 물러서지 않으면서 서울시 입장이 곤란해졌다.

퇴거를 계속 거부함에도 이를 용인할 경우 이미 떠난 단체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서울시가 자의적으로 입주 연장 조치를 할 경우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을 위반할 소지도 있다.

나머지 3개 단체가 퇴거해야 서울시는 노후 건물을 철거하고 잔디 광장을 만들어 시민 편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시는 다음달 시공사를 선정하고 올 연말까지 단계적으로 각종 시설을 철거한다는 계획을 세워뒀다.

서울혁신파크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지난 10여년 간 급격하게 바뀌었던 서울시정 철학이 낳은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서울혁신파크는 보수 정치인이면서도 변화에 집중했던 오세훈과 진보 정치인이면서도 보존에 가치를 뒀던 박원순이라는 두 이례적인 스타일의 시장이 남긴 흔적이다. 개발과 보존의 기로에 놓인 수도 서울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점유 중인 3개 단체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소송에 따른 강제 집행 가능성이 열려 있다. 물리적 충돌과 이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를 막기 위한 양측의 이해와 양보가 필요한 대목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daer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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