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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inNess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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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1981년생인 전 '김민기 세대' 그 후대인 '학전 세대'도 아닙니다. 민주화운동 세대도 아니고, 대학로에서 소극장 콘서트가 번성할 때 지켜보지도 못했죠. 그럼에도 '학전, 어게인 콘서트' 현장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20회 공연 중 치열한 티케팅을 뚫고 3회를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스케치·윤도현이 나왔던 지난달 28일 '학전, 어게인 콘서트' 첫 공연, 방은진·설경구가 출연한 11일 '배우 데이' 공연, 한영애·황정민이 출연한 14일 '김민기 트리뷰트' 마지막 공연을 봤죠.
개관 33주년 당일인 15일 폐관한 학전을 위해 펼쳐진 '학전, 어게인 콘서트'는 일종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냥 슬프지는 않았어요. 진도 지역의 장례문화인 '다시래기'가 떠올랐습니다. 다시래기는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상여놀이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상가에 모여서 노래, 춤, 재담 등으로 놀며 상주를 위로하며 가무극이죠.
'학전, 어게인 콘서트'가 딱 그랬습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이끈 박학기 총감독, 총연출을 맡은 조경식 HK엔터프로 이사를 비롯해 출연진 약 200명은 학전을 잃은 상주이기도 했죠. 학전에 대한 추억을 공유한 관객 역시 상주였습니다. 이은 어우러지면서 서로 위로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미 학전 관계자들은 한 차례 이별을 겪었습니다. 학전그린 소극장이 개관 17년 만인 2013년 폐관했거든요. 학전의 대표작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1994년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초연했지만 1996년 개관한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4000회까지 공연하며 이 극장의 대표 레퍼토리로 통했습니다. 학전그린 소극장 폐관 소식에 많은 관객들이 상심했죠.
그런데 학전 그린과 헤어짐은 이별(離別)이었고, 이번 학전블루와 헤어짐은 작별(作別)이었습니다. 이별은 어찌할 수 없는 수동에 가깝고, 작별은 어떻게든 해야 하는 능동에 가깝죠. 그러니 작별엔 헤어짐을 준비하는 과정이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업성을 배제해 적자가 쌓이고 김민기 대표의 투병까지 겹치면서 물론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실 학전은 어떻게든 이름을 이어갈 여지가 있었습니다. 대학로의 상징이자 소극장 문화운동의 중심지였던 만큼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기에 정부에서도 이름을 지키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학전은 학전답게, 즉 정신적 지주인 김민기답게 아무것도 재지 않고 폐관을 결정했습니다. 학전이 이미 전달한 것처럼 김민기 없는 학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떠나지 못하는 건 이전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이전에 지극했다면,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죠. 학전이 폐관을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죠.
정말 운이 좋게 2010년대 음악·공연 담당 기자를 하면서, 학전과 간접 인연을 맺었습니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싱어송라이터 겸 음악감독 정재일의 진가를 발견한 것도 학전 덕분이었습니다. 2004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 때부터 학전과 인연을 맺어온 그는 뮤지컬 '굿모닝 학교', 연극 '더 복서' 등의 음악을 맡아 우리 청소년 작품 음악의 수준을 끌어올렸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취재는 2018년 2월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열렸던 '2018 학전 신년회'였습니다. 이상적인 문화 공동체가 무너진 시대에 대학로에 그것에 가까운 극단이 있었다는 걸 증험한 자리였습니다. 특히 그간 출연진만 250명이 넘는 '지하철 1호선'에 출연했던 배우 60명이 단체로 자신을 소개하고 서로 추억을 나누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한편의 공연이었고 진풍경이었습니다. 평소 사진 찍기를 꺼려하는 김민기 대표는 그날 후배, 제자들과 함께 기꺼이 사진을 찍었고 평소 보다 더 많이 더 크게 웃었습니다.
그날 신년회가 끝나고 참석자들의 손에는 김민기 1집부터 4집까지의 카세트테이프가 쥐어졌습니다. '창고 정리'라는 명목으로 김민기 대표가 내놓은 것인데, 제 손에도 쥐어졌죠. 1993년 발매한 김민기 전집입니다. '아침이슬' '상록수' '친구' '봉우리' '날개만 있다면' 등 김민기가 그간 발표한 곡들이 총망라됐습니다.
노래 부르는 걸 지극히 부끄러워하는 데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김민기의 성향을 아는 이들에겐 이례적인 음반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학전 운영 자금을 위해 그가 이 음반 제작을 수락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김민기 전집은 현재 온라인 상에서 고가에 재판매되고 있지만 사실 함부로 값어치를 매길 순 없죠.
김광석, 황정민·설경구·김윤석·장현성·조승우 '독수리 5형제'가 탄생한 학전(學田)은 못자리 농사가 된 곳으로 김민기는 농부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포크계의 대부이자 포크계의 거목이죠.
김민기가 '한국 포크'의 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기영 씨가 쓴 단국대 석사 논문 '이식 그리고 독립 : 한국 모던포크 음악의 성립과정'(1968~1975) 중 '한국 모던포크 음악 성립기의 창작곡 대 번안곡 비율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1971년에 35.1%에 머물고 있던 창작곡의 비율이 1972년에는 62.4%로 급증했는데, 이후 계속해서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1971년과 1972년의 사이엔 김민기의 앨범이 존재하고 있다고 논문은 썼죠.
1987년 시청 앞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노제 때 '아침이슬'을 100만명이 함께 부르는 모습을 본 김민기 대표가 "아,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정말 어려운 건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를 하지 않고 견디는 겁니다. 김민기의 노래들은 참고 참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버텨서 투명해질 때 겨우 부르는 노래 같아요. 그래서 감정의 정수만 남아 꾸밈 없이 정직하죠. 그런 점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은 맥락으로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항상 맥락 위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고전입니다. 김민기의 노래가 감동을 주는 건 아름다운 노래라서가 아니라 가장 그다운 노래여서입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의 마지막 노래가 된 '아침이슬'도 그다운 노래지만, 이번 학전 폐관에서 가장 그 다운 노래를 꼽으라면 전 '작은 연못'을 택하고 싶습니다. 상업성이 짙어진 대학로에 학전이 있었다고 그렇게 계속 전해질 것이거든요.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개관 33주년 당일인 15일 폐관한 학전을 위해 펼쳐진 '학전, 어게인 콘서트'는 일종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냥 슬프지는 않았어요. 진도 지역의 장례문화인 '다시래기'가 떠올랐습니다. 다시래기는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상여놀이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상가에 모여서 노래, 춤, 재담 등으로 놀며 상주를 위로하며 가무극이죠.
'학전, 어게인 콘서트'가 딱 그랬습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이끈 박학기 총감독, 총연출을 맡은 조경식 HK엔터프로 이사를 비롯해 출연진 약 200명은 학전을 잃은 상주이기도 했죠. 학전에 대한 추억을 공유한 관객 역시 상주였습니다. 이은 어우러지면서 서로 위로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미 학전 관계자들은 한 차례 이별을 겪었습니다. 학전그린 소극장이 개관 17년 만인 2013년 폐관했거든요. 학전의 대표작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1994년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초연했지만 1996년 개관한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4000회까지 공연하며 이 극장의 대표 레퍼토리로 통했습니다. 학전그린 소극장 폐관 소식에 많은 관객들이 상심했죠.
그런데 학전 그린과 헤어짐은 이별(離別)이었고, 이번 학전블루와 헤어짐은 작별(作別)이었습니다. 이별은 어찌할 수 없는 수동에 가깝고, 작별은 어떻게든 해야 하는 능동에 가깝죠. 그러니 작별엔 헤어짐을 준비하는 과정이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업성을 배제해 적자가 쌓이고 김민기 대표의 투병까지 겹치면서 물론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실 학전은 어떻게든 이름을 이어갈 여지가 있었습니다. 대학로의 상징이자 소극장 문화운동의 중심지였던 만큼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기에 정부에서도 이름을 지키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학전은 학전답게, 즉 정신적 지주인 김민기답게 아무것도 재지 않고 폐관을 결정했습니다. 학전이 이미 전달한 것처럼 김민기 없는 학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떠나지 못하는 건 이전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이전에 지극했다면,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죠. 학전이 폐관을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죠.
정말 운이 좋게 2010년대 음악·공연 담당 기자를 하면서, 학전과 간접 인연을 맺었습니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싱어송라이터 겸 음악감독 정재일의 진가를 발견한 것도 학전 덕분이었습니다. 2004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 때부터 학전과 인연을 맺어온 그는 뮤지컬 '굿모닝 학교', 연극 '더 복서' 등의 음악을 맡아 우리 청소년 작품 음악의 수준을 끌어올렸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취재는 2018년 2월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열렸던 '2018 학전 신년회'였습니다. 이상적인 문화 공동체가 무너진 시대에 대학로에 그것에 가까운 극단이 있었다는 걸 증험한 자리였습니다. 특히 그간 출연진만 250명이 넘는 '지하철 1호선'에 출연했던 배우 60명이 단체로 자신을 소개하고 서로 추억을 나누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한편의 공연이었고 진풍경이었습니다. 평소 사진 찍기를 꺼려하는 김민기 대표는 그날 후배, 제자들과 함께 기꺼이 사진을 찍었고 평소 보다 더 많이 더 크게 웃었습니다.
그날 신년회가 끝나고 참석자들의 손에는 김민기 1집부터 4집까지의 카세트테이프가 쥐어졌습니다. '창고 정리'라는 명목으로 김민기 대표가 내놓은 것인데, 제 손에도 쥐어졌죠. 1993년 발매한 김민기 전집입니다. '아침이슬' '상록수' '친구' '봉우리' '날개만 있다면' 등 김민기가 그간 발표한 곡들이 총망라됐습니다.
노래 부르는 걸 지극히 부끄러워하는 데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김민기의 성향을 아는 이들에겐 이례적인 음반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학전 운영 자금을 위해 그가 이 음반 제작을 수락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김민기 전집은 현재 온라인 상에서 고가에 재판매되고 있지만 사실 함부로 값어치를 매길 순 없죠.
김광석, 황정민·설경구·김윤석·장현성·조승우 '독수리 5형제'가 탄생한 학전(學田)은 못자리 농사가 된 곳으로 김민기는 농부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포크계의 대부이자 포크계의 거목이죠.
김민기가 '한국 포크'의 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기영 씨가 쓴 단국대 석사 논문 '이식 그리고 독립 : 한국 모던포크 음악의 성립과정'(1968~1975) 중 '한국 모던포크 음악 성립기의 창작곡 대 번안곡 비율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1971년에 35.1%에 머물고 있던 창작곡의 비율이 1972년에는 62.4%로 급증했는데, 이후 계속해서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1971년과 1972년의 사이엔 김민기의 앨범이 존재하고 있다고 논문은 썼죠.
1987년 시청 앞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노제 때 '아침이슬'을 100만명이 함께 부르는 모습을 본 김민기 대표가 "아,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정말 어려운 건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를 하지 않고 견디는 겁니다. 김민기의 노래들은 참고 참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버텨서 투명해질 때 겨우 부르는 노래 같아요. 그래서 감정의 정수만 남아 꾸밈 없이 정직하죠. 그런 점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은 맥락으로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항상 맥락 위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고전입니다. 김민기의 노래가 감동을 주는 건 아름다운 노래라서가 아니라 가장 그다운 노래여서입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의 마지막 노래가 된 '아침이슬'도 그다운 노래지만, 이번 학전 폐관에서 가장 그 다운 노래를 꼽으라면 전 '작은 연못'을 택하고 싶습니다. 상업성이 짙어진 대학로에 학전이 있었다고 그렇게 계속 전해질 것이거든요.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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