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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inNess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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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밤과 낮 그리고 순환. 그렇게 반복되는 삶 같은 피라미드의 24개 칸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들어있다. 생성과 소멸, 결혼 그리고 노동과 전쟁까지.
8분 남짓한 한국계 미국인 에릭 오(40·오수형)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OPERA)'는 삶의 완벽한 시(詩)적 은유라는 평을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물론 계급, 환경, 인종, 테러 등 인류의 모든 것이 압축됐다.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제93회) 후보에 올랐다는 화려한 수식이 오히려 이 작품의 본질적 가치를 외면하게 만든다.
에릭 오가 오는 25일 제주 제주시 애월에 개관하는 대형 복합문화공간 '하우스오브레퓨즈(House of Refuge)'에서 선보이는 대형 상설 전시 'O :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O : AN ERICK OH RETROSPECTIVE)'는 이 '오페라'를 더 들여다보는 체험이 가능하다. '오페라'와 2022년 영국 '프리즈(Frieze)'의 서울 공동 개최 첫 회를 맞아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에서 선보였던 '오리진(ORIGIN)' 그리고 다수의 신작들을 미디어 설치 작품으로 만날 수 있다.
'오페라'를 중심으로 일곱 개의 작품으로 서사를 만드는 이번 전시는 일종의 삶의 변주다. 일상을 톺아보면서 삶의 미시학을 애니메이션에 펼쳐낸 에릭 오의 통찰이 관객 각자와 관계성을 맺으며 보편적인 걸 찾아내는 인생의 거시학으로 승화하면서, 우리 주변을 환기한다.
서울대 서양학과에서 공부하고 픽사의 애니메이터로서 '몬스터 대학교' '인사이드 아웃' '도리를 찾아서' 등의 작업에 참여했으며 '댐 키퍼(The Dam Keeper)'로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른 이력은 에릭 오의 일부를 대변할 수 있지만, 본질을 다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번 전시는 작가 에릭 오를 제대로 만나는 시간이다.
다음은 최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에릭 오의 소속사 비스츠앤네이티브스(BANA·바나)에서 그와 만나 나눈 일문일답.
-이번 전시는 어떻게 시작이 된 겁니까?
"이번 전시는 제가 그동안 만들어온 신작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를 함께 보여주는 '레트로스펙티브(retrospective·회고하는)' 성향의 전시가 될 거예요. 중앙에 있는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오페라'가 될 거고요. '오페라'는 오스카 후보로 조명을 받으면서 화제가 됐던 작품인데, 사실 제작 당시부터 이 작품을 전시로 풀고 싶었어요. 통으로 보여주는 형식의 영화거든요. 영화관에서 한정된 러닝타임 동안 한 번 보고 끝날 게 아니라 여러 번을 보면서 관객들이 다양한 관점으로, 본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도 하는 식으로 감상하는 작품이에요. 그런데 공교롭게 작품을 마무리할 때쯤에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전시로는 바로 이어지지 못했죠. 영화제를 중심으로 작품을 소개하다가 이번에 감사하게도 영광스러운 경험까지 하게 된 거죠. 근데 오페라가 갖고 있는 세계관이 굉장히 커요. 이전부터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다양한 서사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걸 담은 새로운 작품까지 버무려서 '애니메이션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겁니다."
-'오페라'가 인간 삶에 대한 얘기니까 관객들이 스스로 각자 삶과 관계 맺기가 가능하겠네요. 중앙에 '오페라'가 자리한다는 건 클라이맥스라는 얘기인 건가요?
"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까, 전시회 경험 자체도 병렬적으로 보는 게 아닌 나름의 스토리텔링을 가졌으면 했어요. 관객들이 동선을 따라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만나는 작품과 그 다음에 만나는 작품들이 서사를 갖고 이어지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다가 영화로 치면 가장 절정에 달하는 시점에 '오페라'가 등장을 한 뒤 그 다음에 전시를 마무리하는 작품이 있는 느낌입니다. 총 일곱 개 작품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전시 구성과 동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전시엔 독특한 특색이 하나 있습니다. 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있어요. 낮과 밤이 2분30초 간격으로 계속 루핑(looping)이 돼요.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작품들이 그 시간대에 맞춰 무한적으로 순환하고 있거든요. 관객이 이 전시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간대로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 안에서 감상하는 포인트가 있을 거 같습니다. '오페라'만 해도 낮과 밤이 계속 순환을 하거든요. 몇 번을 경험하고 가실지 모를 일이죠."
-재밌네요. 어떤 분들은 영겁(永劫)의 시간을 느낄 수도 있겠네요.
"이번 전시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순환'일 것 같아요. 끝과 시작, 선과 악 등 옳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돼 순환하는 거죠. 질서와 무질서 같은 현학적인 얘기도 많이 다루고요. 문명에 입각한 실존적인 얘기들도 그렇지만 굉장히 추상적인 것들도 결국엔 한 지점으로 연결되거든요. 이번 작품의 경험 순서도 수미상관 형식이에요. 어떤 영화적인 워딩을 빌리자면 '마지막에 공간을 나설 때, 우리가 처음 들어오자마자 경험했던 것과 같은 순간이네'죠."
-감독님 작품은 형식과 내용과 메시지가 딱 맞물리는 것 같아요. 게다가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 석사 과정을 밟으셨는데 예술, 인문학, 철학 거기에 공학까지 조화를 이룹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비결이 있나요?
"지금 말씀하신 게 다 분리된 것들이 아니더라고요. 어떤 분야 혹은 어떤 학문들의 본질은 같다는 생각을 늘 해요. 결국 어떤 결과물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열거하신 것들을 자연스럽게 공부하고 습득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삶이라는 것을 진중하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게 맞잖아요."
-그런 걸 통찰이라는 워딩으로 부를 수 있을 듯합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하루하루를 관찰하는 느낌으로 바라봐요. 인류의 역사라든가 환경적인 측면들, 사회적 이슈들 그런 것들에 대해 늘 절실하게 고민하는 편이긴 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에 대한 고민을 늘 하다 보니까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제주와 감독님이 직접적인 인연은 없는 것으로 알지만 감독님과 잘 어울리는 곳이에요. 제주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삶의 안정을 기원하는 무속신앙, 굿 문화가 발달해 있는데 감독님 작품에서 삶에 대한 기원과 희망이 묻어나 있잖아요.
"작품과 더 나아가 이 전시라는 키워드 자체가 자연, 인류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잘 균형 잡혀 존재하는 제주에서 선보일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만약 서울 한복판에서 전시를 한다면 감성이 너무 달라질 것 같거든요. 개인적으로 제가 제주도랑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 바다 쪽에 사는데 그곳 풍경이 제주도랑 비슷하긴 해요."
-최근 극장도 점점 체험 공간으로 바뀌는 듯합니다. 아이맥스나 4D 같은 것이 인기를 끄는 이유죠. OTT, 숏폼 미디어 등 플랫폼의 변화에 대한 영화계 고민이 큰데 이번 전시 형태 역시 그런 고민의 변화와 맞물리는 지점이 있을 듯합니다.
"그런 고민이 무의식적으로 수렴된 것 같아요. 영화를 소비하고 관람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저 역시 내러티브 구조의 전형적인 영화도 계속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적응 혹은 고민해나가야 하는 부분들에 대해 이전부터 생각을 해왔죠. 애니메이션이든 영상이든 훨씬 이머시브(immersive)하게 즉, 압도되는 경험으로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해온 거죠."
-'오페라'는 처음부터 전시형으로 구상하셨던 작품이고, '나무'는 가상현실(VR) 애니메이션 작품이잖아요. 또 서양화는 2D 작업이고 애니메이터는 3D 작업인데 감독님 삶과 작업의 궤적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시점을 바라보는 행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술을 표현하시는 분들이나 창작하시는 분들은 모두 그럴 것 같은데 저도 순간순간 공부하고 싶고 혹은 경험하고 싶은 걸 따라갔던 게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어떤 걸 공부하다 그 반동으로 저쪽으로 가기도 하고….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을 해본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지금 제 시점이 된 게 아닌가 합니다."
-이번 전시는 제주도에서 시작하지만 투어 형태로 될 수 있는 거잖아요.
"투어 형식은 저희들의 목표 안에 있기도 해요. 약간의 변주가 될 수 있는 있지만 패키지가 한 번 되면 다른 베뉴(Venue)로 가서 고스란히 소개될 수가 있죠."
-처음엔 감독님이 바나에 계신 게 조금 낯설긴 했어요. 그런데 바나의 좋은 취향 그리고 브랜딩 능력이 감독님과 시너지를 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나엔 래퍼 빈지노, 신드롬 걸그룹 '뉴진스'와 작업으로 유명한 DJ 겸 프로듀서 이오공(250)과 프랭크(FRNK), 그룹 'f(x)' 출신 크리스탈 등이 속해 있다.)
"시너지가 많죠. 바나는 뮤지션이든 다른 걸 표현하는 창작자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역량 혹은 고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특화된 팀이거든요. 그런 부분에 있어 늘 든든하게 지원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 전시가 전적으로 좋은 예죠. 좋은 콘텐츠를 담고 있지만 전례 없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시점으로 봐줘야 함께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거든요."
-그런 환경에 계셔서 VR회사 '오큘러스'를 산하에 둔 페이스북의 의뢰로 VR 단편 '나무'를 작업하시는 등 공학적인 것에도 상당히 열린 예술가이십니다. 기술을 스토리텔링에 잘 녹여내시는데 그 유연성이 부럽기도 해요.
"물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당연히 제게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이라는 건, 우리가 이야기하는 걸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더 좋은 그릇이 나올 테니, 그러면 그럴수록 그 안에 담는 알맹이에 더 집중해야 하죠. 이제 화려한 이펙트가 있는 시각적인 걸 강조해도 감흥이 덜하잖아요. 히어로물이 좋은 예시죠. 아무리 비주얼로 점철돼도 스토리가 약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져요. 결국 이제 콘텐츠는 더 원초적인 좋은 이야기로 귀결이 되는 거 같아요."
-이야기와 함께 음악도 중요하게 여기시는 걸로 압니다.
"영상물에서 사운드는 거의 영상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창작자 입장에서 음악은 너무 중요한 요소죠. 운 좋게도 이번 전시엔 이오공(250) 프로듀서님이 음악 작업을 다 해주시고 계세요. 공간에 대한 사운드적 연출과 신작에 대한 음악 작업들을 해주시고 계셔서 250 프로듀서님 팬들한테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뉴스 거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픽사 출신, 오스카 후보 감독님에게 항상 따라 붙는 수식입니다. 그런데 감독님의 태도가 좋은 건 이런 수식에 연연하지 않는 동시에 부러 피하면서 예술가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 수식을 대하는 균형감 있는 태도는 쉽지 않은데 말이죠.
"사실은 좀 어렸을 때는 속으로 '그만하세요'라는 마음이 늘 있긴 했어요. 이제는 그냥 이것도 '내 일부구나' 사실을 받아들여요. 픽사라는 조직에는 7년 가까이 몸담았는데 배운 게 너무 많거든요. 제 일부라는 걸 인정하면서 그걸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고, 그걸 과잉으로 내세우지도 않으려고 해요. 과거에 저는 그랬었고 이 길을 걸었고 지금은 또 다른 길을 가고 있어요. 그냥 그런 느낌인 거죠."
-현재 예술가로서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콘텐츠를 굉장히 빨리 소비하는 시대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지금 관객들에게 어떻게 하면 제가 믿는 좋은 이야기들을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죠. 지켜보는 것에 대한 인내심이 떨어진 것 같고 빨리빨리 자극적인, 요즘 말로 도파민이 포화됐다고 하잖아요. 물론 제가 트렌드를 따라간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 동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제가 갖고 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것이냐가 관건이죠. 또 영화 업계도 많이 지금 바뀌고 있거든요. 큰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는 작은 이야기들을 저예산으로 폭발력 있게 만들어내는 시대가 도래할 것 같아요. 황금기를 일군 거대 스튜디오들의 힘들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고 천부적인 재능이나 비전이 있는 사람들은 큰 제작사 밖으로 나와서 본인들의 힘을 토해내는 흐름이 보이거든요. 그런 지점에서 인공지능(AI)이 양날의 검인 거예요. 잘 아시겠지만 AI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잖아요. 반면 창작자들도 AI 덕분에 큰 제작사가 필요 없게 된 거죠. 지금은 흥미로운 과도기예요. 현재 아무도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갈 거냐에 대한 맥을 못 잡고 있는 상황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방향을 잡고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거죠."
-이런 상황일수록 감독님이 말씀하셨던 알맹이가 더 중요해지는 거 같아요. 그리고 어느 상황이든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한 거 같고요. 이런 화두를 압축한 게 이번 전시 같아요. 감독님의 비전을 관객들이 탐험하는 자리가 될 거 같습니다.
"이번 전시가 제 커리어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어떤 마일스톤(Milestone)이 될 거 같아요. 그동안 기획했던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이 있지만 일단 규모 면에서 가장 크죠. 작품 수가 일곱 개나 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금 갈 길을 잃었고, 애니메이션도 예전 같지 않고, 영화판도 그렇고 그런 상황에서 이전에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만약에 좋은 기운과 반응을 또 얻는다면 확신을 갖고 좀 더 밀고 나갈 수 있는 여지도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작가적 기질을 많이 갖고 계셨지만 이번 전시로 감독님에 대해 작가라는 호칭이 더 단단해질 거 같습니다.
"전 처음부터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했지만 외부에서 범주를 정하고 정의를 내리는 거는 어쩔 수가 없잖아요. 이번 전시는 외부에서 보시기에도 '작가적인 행보'를 해버린 거니까요. 근데 제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건 감독이든 작가든 그런 타이틀을 오히려 초월하는 거예요."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8분 남짓한 한국계 미국인 에릭 오(40·오수형)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OPERA)'는 삶의 완벽한 시(詩)적 은유라는 평을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물론 계급, 환경, 인종, 테러 등 인류의 모든 것이 압축됐다.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제93회) 후보에 올랐다는 화려한 수식이 오히려 이 작품의 본질적 가치를 외면하게 만든다.
에릭 오가 오는 25일 제주 제주시 애월에 개관하는 대형 복합문화공간 '하우스오브레퓨즈(House of Refuge)'에서 선보이는 대형 상설 전시 'O :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O : AN ERICK OH RETROSPECTIVE)'는 이 '오페라'를 더 들여다보는 체험이 가능하다. '오페라'와 2022년 영국 '프리즈(Frieze)'의 서울 공동 개최 첫 회를 맞아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에서 선보였던 '오리진(ORIGIN)' 그리고 다수의 신작들을 미디어 설치 작품으로 만날 수 있다.
'오페라'를 중심으로 일곱 개의 작품으로 서사를 만드는 이번 전시는 일종의 삶의 변주다. 일상을 톺아보면서 삶의 미시학을 애니메이션에 펼쳐낸 에릭 오의 통찰이 관객 각자와 관계성을 맺으며 보편적인 걸 찾아내는 인생의 거시학으로 승화하면서, 우리 주변을 환기한다.
서울대 서양학과에서 공부하고 픽사의 애니메이터로서 '몬스터 대학교' '인사이드 아웃' '도리를 찾아서' 등의 작업에 참여했으며 '댐 키퍼(The Dam Keeper)'로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른 이력은 에릭 오의 일부를 대변할 수 있지만, 본질을 다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번 전시는 작가 에릭 오를 제대로 만나는 시간이다.
다음은 최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에릭 오의 소속사 비스츠앤네이티브스(BANA·바나)에서 그와 만나 나눈 일문일답.
-이번 전시는 어떻게 시작이 된 겁니까?
"이번 전시는 제가 그동안 만들어온 신작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를 함께 보여주는 '레트로스펙티브(retrospective·회고하는)' 성향의 전시가 될 거예요. 중앙에 있는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오페라'가 될 거고요. '오페라'는 오스카 후보로 조명을 받으면서 화제가 됐던 작품인데, 사실 제작 당시부터 이 작품을 전시로 풀고 싶었어요. 통으로 보여주는 형식의 영화거든요. 영화관에서 한정된 러닝타임 동안 한 번 보고 끝날 게 아니라 여러 번을 보면서 관객들이 다양한 관점으로, 본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도 하는 식으로 감상하는 작품이에요. 그런데 공교롭게 작품을 마무리할 때쯤에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전시로는 바로 이어지지 못했죠. 영화제를 중심으로 작품을 소개하다가 이번에 감사하게도 영광스러운 경험까지 하게 된 거죠. 근데 오페라가 갖고 있는 세계관이 굉장히 커요. 이전부터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다양한 서사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걸 담은 새로운 작품까지 버무려서 '애니메이션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겁니다."
-'오페라'가 인간 삶에 대한 얘기니까 관객들이 스스로 각자 삶과 관계 맺기가 가능하겠네요. 중앙에 '오페라'가 자리한다는 건 클라이맥스라는 얘기인 건가요?
"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까, 전시회 경험 자체도 병렬적으로 보는 게 아닌 나름의 스토리텔링을 가졌으면 했어요. 관객들이 동선을 따라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만나는 작품과 그 다음에 만나는 작품들이 서사를 갖고 이어지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다가 영화로 치면 가장 절정에 달하는 시점에 '오페라'가 등장을 한 뒤 그 다음에 전시를 마무리하는 작품이 있는 느낌입니다. 총 일곱 개 작품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전시 구성과 동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전시엔 독특한 특색이 하나 있습니다. 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있어요. 낮과 밤이 2분30초 간격으로 계속 루핑(looping)이 돼요.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작품들이 그 시간대에 맞춰 무한적으로 순환하고 있거든요. 관객이 이 전시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간대로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 안에서 감상하는 포인트가 있을 거 같습니다. '오페라'만 해도 낮과 밤이 계속 순환을 하거든요. 몇 번을 경험하고 가실지 모를 일이죠."
-재밌네요. 어떤 분들은 영겁(永劫)의 시간을 느낄 수도 있겠네요.
"이번 전시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순환'일 것 같아요. 끝과 시작, 선과 악 등 옳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돼 순환하는 거죠. 질서와 무질서 같은 현학적인 얘기도 많이 다루고요. 문명에 입각한 실존적인 얘기들도 그렇지만 굉장히 추상적인 것들도 결국엔 한 지점으로 연결되거든요. 이번 작품의 경험 순서도 수미상관 형식이에요. 어떤 영화적인 워딩을 빌리자면 '마지막에 공간을 나설 때, 우리가 처음 들어오자마자 경험했던 것과 같은 순간이네'죠."
-감독님 작품은 형식과 내용과 메시지가 딱 맞물리는 것 같아요. 게다가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 석사 과정을 밟으셨는데 예술, 인문학, 철학 거기에 공학까지 조화를 이룹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비결이 있나요?
"지금 말씀하신 게 다 분리된 것들이 아니더라고요. 어떤 분야 혹은 어떤 학문들의 본질은 같다는 생각을 늘 해요. 결국 어떤 결과물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열거하신 것들을 자연스럽게 공부하고 습득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삶이라는 것을 진중하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게 맞잖아요."
-그런 걸 통찰이라는 워딩으로 부를 수 있을 듯합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하루하루를 관찰하는 느낌으로 바라봐요. 인류의 역사라든가 환경적인 측면들, 사회적 이슈들 그런 것들에 대해 늘 절실하게 고민하는 편이긴 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에 대한 고민을 늘 하다 보니까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제주와 감독님이 직접적인 인연은 없는 것으로 알지만 감독님과 잘 어울리는 곳이에요. 제주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삶의 안정을 기원하는 무속신앙, 굿 문화가 발달해 있는데 감독님 작품에서 삶에 대한 기원과 희망이 묻어나 있잖아요.
"작품과 더 나아가 이 전시라는 키워드 자체가 자연, 인류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잘 균형 잡혀 존재하는 제주에서 선보일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만약 서울 한복판에서 전시를 한다면 감성이 너무 달라질 것 같거든요. 개인적으로 제가 제주도랑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 바다 쪽에 사는데 그곳 풍경이 제주도랑 비슷하긴 해요."
-최근 극장도 점점 체험 공간으로 바뀌는 듯합니다. 아이맥스나 4D 같은 것이 인기를 끄는 이유죠. OTT, 숏폼 미디어 등 플랫폼의 변화에 대한 영화계 고민이 큰데 이번 전시 형태 역시 그런 고민의 변화와 맞물리는 지점이 있을 듯합니다.
"그런 고민이 무의식적으로 수렴된 것 같아요. 영화를 소비하고 관람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저 역시 내러티브 구조의 전형적인 영화도 계속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적응 혹은 고민해나가야 하는 부분들에 대해 이전부터 생각을 해왔죠. 애니메이션이든 영상이든 훨씬 이머시브(immersive)하게 즉, 압도되는 경험으로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해온 거죠."
-'오페라'는 처음부터 전시형으로 구상하셨던 작품이고, '나무'는 가상현실(VR) 애니메이션 작품이잖아요. 또 서양화는 2D 작업이고 애니메이터는 3D 작업인데 감독님 삶과 작업의 궤적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시점을 바라보는 행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술을 표현하시는 분들이나 창작하시는 분들은 모두 그럴 것 같은데 저도 순간순간 공부하고 싶고 혹은 경험하고 싶은 걸 따라갔던 게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어떤 걸 공부하다 그 반동으로 저쪽으로 가기도 하고….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을 해본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지금 제 시점이 된 게 아닌가 합니다."
-이번 전시는 제주도에서 시작하지만 투어 형태로 될 수 있는 거잖아요.
"투어 형식은 저희들의 목표 안에 있기도 해요. 약간의 변주가 될 수 있는 있지만 패키지가 한 번 되면 다른 베뉴(Venue)로 가서 고스란히 소개될 수가 있죠."
-처음엔 감독님이 바나에 계신 게 조금 낯설긴 했어요. 그런데 바나의 좋은 취향 그리고 브랜딩 능력이 감독님과 시너지를 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나엔 래퍼 빈지노, 신드롬 걸그룹 '뉴진스'와 작업으로 유명한 DJ 겸 프로듀서 이오공(250)과 프랭크(FRNK), 그룹 'f(x)' 출신 크리스탈 등이 속해 있다.)
"시너지가 많죠. 바나는 뮤지션이든 다른 걸 표현하는 창작자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역량 혹은 고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특화된 팀이거든요. 그런 부분에 있어 늘 든든하게 지원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 전시가 전적으로 좋은 예죠. 좋은 콘텐츠를 담고 있지만 전례 없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시점으로 봐줘야 함께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거든요."
-그런 환경에 계셔서 VR회사 '오큘러스'를 산하에 둔 페이스북의 의뢰로 VR 단편 '나무'를 작업하시는 등 공학적인 것에도 상당히 열린 예술가이십니다. 기술을 스토리텔링에 잘 녹여내시는데 그 유연성이 부럽기도 해요.
"물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당연히 제게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이라는 건, 우리가 이야기하는 걸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더 좋은 그릇이 나올 테니, 그러면 그럴수록 그 안에 담는 알맹이에 더 집중해야 하죠. 이제 화려한 이펙트가 있는 시각적인 걸 강조해도 감흥이 덜하잖아요. 히어로물이 좋은 예시죠. 아무리 비주얼로 점철돼도 스토리가 약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져요. 결국 이제 콘텐츠는 더 원초적인 좋은 이야기로 귀결이 되는 거 같아요."
-이야기와 함께 음악도 중요하게 여기시는 걸로 압니다.
"영상물에서 사운드는 거의 영상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창작자 입장에서 음악은 너무 중요한 요소죠. 운 좋게도 이번 전시엔 이오공(250) 프로듀서님이 음악 작업을 다 해주시고 계세요. 공간에 대한 사운드적 연출과 신작에 대한 음악 작업들을 해주시고 계셔서 250 프로듀서님 팬들한테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뉴스 거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픽사 출신, 오스카 후보 감독님에게 항상 따라 붙는 수식입니다. 그런데 감독님의 태도가 좋은 건 이런 수식에 연연하지 않는 동시에 부러 피하면서 예술가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 수식을 대하는 균형감 있는 태도는 쉽지 않은데 말이죠.
"사실은 좀 어렸을 때는 속으로 '그만하세요'라는 마음이 늘 있긴 했어요. 이제는 그냥 이것도 '내 일부구나' 사실을 받아들여요. 픽사라는 조직에는 7년 가까이 몸담았는데 배운 게 너무 많거든요. 제 일부라는 걸 인정하면서 그걸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고, 그걸 과잉으로 내세우지도 않으려고 해요. 과거에 저는 그랬었고 이 길을 걸었고 지금은 또 다른 길을 가고 있어요. 그냥 그런 느낌인 거죠."
-현재 예술가로서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콘텐츠를 굉장히 빨리 소비하는 시대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지금 관객들에게 어떻게 하면 제가 믿는 좋은 이야기들을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죠. 지켜보는 것에 대한 인내심이 떨어진 것 같고 빨리빨리 자극적인, 요즘 말로 도파민이 포화됐다고 하잖아요. 물론 제가 트렌드를 따라간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 동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제가 갖고 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것이냐가 관건이죠. 또 영화 업계도 많이 지금 바뀌고 있거든요. 큰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는 작은 이야기들을 저예산으로 폭발력 있게 만들어내는 시대가 도래할 것 같아요. 황금기를 일군 거대 스튜디오들의 힘들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고 천부적인 재능이나 비전이 있는 사람들은 큰 제작사 밖으로 나와서 본인들의 힘을 토해내는 흐름이 보이거든요. 그런 지점에서 인공지능(AI)이 양날의 검인 거예요. 잘 아시겠지만 AI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잖아요. 반면 창작자들도 AI 덕분에 큰 제작사가 필요 없게 된 거죠. 지금은 흥미로운 과도기예요. 현재 아무도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갈 거냐에 대한 맥을 못 잡고 있는 상황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방향을 잡고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거죠."
-이런 상황일수록 감독님이 말씀하셨던 알맹이가 더 중요해지는 거 같아요. 그리고 어느 상황이든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한 거 같고요. 이런 화두를 압축한 게 이번 전시 같아요. 감독님의 비전을 관객들이 탐험하는 자리가 될 거 같습니다.
"이번 전시가 제 커리어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어떤 마일스톤(Milestone)이 될 거 같아요. 그동안 기획했던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이 있지만 일단 규모 면에서 가장 크죠. 작품 수가 일곱 개나 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금 갈 길을 잃었고, 애니메이션도 예전 같지 않고, 영화판도 그렇고 그런 상황에서 이전에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만약에 좋은 기운과 반응을 또 얻는다면 확신을 갖고 좀 더 밀고 나갈 수 있는 여지도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작가적 기질을 많이 갖고 계셨지만 이번 전시로 감독님에 대해 작가라는 호칭이 더 단단해질 거 같습니다.
"전 처음부터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했지만 외부에서 범주를 정하고 정의를 내리는 거는 어쩔 수가 없잖아요. 이번 전시는 외부에서 보시기에도 '작가적인 행보'를 해버린 거니까요. 근데 제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건 감독이든 작가든 그런 타이틀을 오히려 초월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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