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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inNess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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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박찬욱(61) 감독이 스파이 소설 마니아라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온갖 스파이 장르 문학을 섭렵했고, 그 중에서도 영국 작가 존 르 카레 작품에 심취했다는 건 박 감독이 앞서 각종 인터뷰에서 수차례 밝힌 바 있다. 스파이를 향한 박 감독의 애정은 그가 만든 첫 번째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2018)로 발현됐다. 이 시리즈는 바로 그 르 카레가 1983년에 내놓은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다.
◇다시 스파이 시리즈로 돌아온 박찬욱
박 감독이 지난 15일 6년만에 두 번째 시리즈를 내놨다. HBO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The Sympathizer)다. 박 감독은 이번에도 스파이 소설을 각색한 작품을 택했다. 원작은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이 2015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 응우옌 작가는 국내에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이 작품은 출간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인정 받았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남베트남 특부수 소속 군인이자 북베트남이 심어 놓은 간첩인 '캡틴'이 동시에 미국 CIA를 위해 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18일 오후 국내에서 '동조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박 감독은 르 카레 작품에 심취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스파이물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과 영화감독이 된다는 건 어쩌면 연결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스파이가 하는 일과 영화감독이 하는 일이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였다.
◇"스파이와 영화감독은 비슷해"
"르 카레 소설엔 '스마일리'라는 스파이 마스터가 있어요. 공작 계획을 짜는 사람이죠. 그가 하는 일은 마치 영화감독이 하는 일과 유사합니다. 스파이 마스터는 거대한 거짓말을 만들어서 그걸 믿게 하는 사람이잖아요. 저처럼 제작과 작가를 겸하는 영화감독도 그렇죠. 예산을 따내고, 그 예산을 집행할 팀을 꾸리고요. 전면에 나서 상대를 속일 배우, 그러니까 스파이를 캐스팅한다라는 거죠. 그리고 이 모든 게 진짜처럼 보이게끔 사소한 디테일 하나 하나를 설계하는 겁니다. 결국 영화감독이 된 제 성향과 스파이 소설을 좋아하는 성향은 다르지 않아요."
간담회에 앞서 '동조자' 1·2회가 공개됐다. 총 7부작이지만 2회차까지만 보더라도 이 시리즈에 박 감독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아이러니·패러독스·부조리가 기저에 흐른다는 걸 알 수 있다. 박 감독 역시 이 부분을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끊임 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패러독스·부조리를 명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인 작품이 아니라는 거였죠. 바깥으로 보여지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아이러니·패러독스·부조리
주인공 '캡틴'은 박 감독이 언급한 그 세 가지 키워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극 중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미국인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런 대사로 시작한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밀정,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모든 일의 양면을 보는 저주를 받았죠." 박 감독은 "두 개 관점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능력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저주 받았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종합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분열되기도 쉬울 겁니다. 어느 쪽에도 설 수 없으니까요. 이쪽과 저쪽이 극단적으로 투쟁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저주가 될 수 있는 거죠."
'동조자'는 캡틴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베트남 전쟁을 돌아보는 작품이기도 하다. 베트남전에 뛰어든 미국과 미국이 개입이 남긴 상처, 15년 간 이어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으로 떠나온 베트남 난민들, 베트남계 미국인으로 성장해 이중적 자아를 갖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박 감독은 자신이 베트남 사람도, 그렇다고 미국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리감을 갖고 객관성을 유지해 이 사안을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전 두 나라에 대해 완전하게 알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모르지도 않아요. 우리나라도 베트남과 유사한 역사를 갖고 있어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캡틴은 미국 대중문화를 동경하는데,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기도 하죠. 저는 제 나름의 객관성을 갖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존중을 담아서 영화적인 표현으로 이 작품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로다주 1인4역은 미국의 얼굴"
이 작품엔 주인공 캡틴을 연기한 베트남계 호주인 배우 호아 쉬안데를 비롯해 베트남계 배우들이 주로 출연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건 단연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다. 그는 '동조자'에서 1인 4역을 맡아 각기 다른 인물을 각기 다른 색채로 연기한다. 박 감독은 "이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백인 중년 남성 배우가 누가 있냐고 했을 때, 떠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제작진 모두 다우니 주니어를 똑같이 떠올렸다"고 했다. "다우니 주니어가 워낙 슈퍼스타이기도 하고, 시리즈에 출연한 적이 없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중에 후회하기 싫어서 일단 제안을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바로 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죠."
다우니 주니어는 CIA요원, 교수, 영화감독, 하원의원 등을 연기한다. 박 감독은 그에게 4개 역할을 맡긴 것에 대해 "이들 캐릭터가 결국 미국의 얼굴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했다"며 "관객이 이런 맥락을 단번에 이해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동료들한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한참 고민하다가 제 생각을 꺼냈어요. 그런데 오히려 좋아하더라고요."
◇"다음 회차 기다리며 음미해주길"
박 감독은 '동조자'의 캐나다 출신 제작자 돈 맥켈러와 함께 이 작품에 공동 쇼러너(co-showrunner)로 참여하고 극본 역시 멕켈러와 함께 썼다. 다만 연출은 1~3회만 맡았다. 미국에선 시리즈를 만들 때 총괄 지휘자 역할로 쇼러너를 정하고 각 에피소드를 각기 다른 연출가와 작가가 나눠 맡는 게 일반적이다. 박 감독은 "모든 에피소드를 다 연출하고 싶었지만 체력적인 한계도 있었고, 촬영과 동시에 극본을 계속 써나가며 수정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4회를 제외하고 동일한 연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논의했고, 후반 작업엔 직접 했기 때문에 한 감독이 만든 동일한 톤을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 감독은 가장 절정의 순간에서 다음 회로 넘어가는 TV 드라마 특유의 클리프행어(cliffhanger) 좋아한다며 다음 회를 궁금해하는 그 마음으로 작품을 음미하면서 즐겨달라고 했다. "누군가는 클리프행어를 싸구려 트릭이라고도 하지만 전 그걸 좋아합니다. TV 드라마는 그 맛에 보는 거니까요. 물론 다른 나라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한국 시청자도 느끼는 게 많은 이야기일 거예요." '동조자'는 매주 월요일 오후 쿠팡플레이에서 1회씩 공개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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