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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inNess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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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김태용 감독과 인공지능이라는 소재는 언뜻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조합으로 보인다. 전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가족의 탄생'(2006) 그리고 '만추'(2011)를 감싸는 감수성과 AI라는 말에 담긴 인위성 사이의 온도 차는 꽤나 커보이니까. 미래 최첨단 기술을 담은 영화들이 대개 스펙터클을 지향한다는 점이 이런 선입견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감독의 새 영화 '원더랜드'(6월5일 공개)를 보고 나면 인공지능이 그러거나 말거나 김태용의 영화는 김태용의 영화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의 영화는 진솔함과 정교함이 함께 있고, 감성적이면서 지적이다. 과작하는데도 그를 향한 관객의 애정이 식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일 것이다. 다만 '원더랜드'가 김 감독의 최고작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굳이 말하자면 '원더랜드'는 '가족의 탄생' 2부이자 SF버전. '가족의 탄생'이 각기 다른 에피소드를 병렬해놓고 가족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과 관계를 탐구해 들어갔던 것처럼 신작 역시 다수 캐릭터가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늘어놓고 인공지능 기술이 스며들어온 세상 속 인간과 관계를 들여다본다. 이 과정을 통해 '원더랜드'는 묻는다. 그 물음은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이며 철학적이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죽음은 인간 관계를 과연 종결시키는지, AI로 유지되는 관계는 진짜 관계라고 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관계라는 건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만 가능한 것인지, AI와 새로 맺는 관계가 실재했던 관계를 왜곡할 수도 있는지, 관계라는 건 어쩌면 믿음의 영역은 아닌지, 그리고 인간성이라는 건 무엇인지 등. '원더랜드'는 다양한 주제를 짚어내며 깊이 파기보다 넓게 판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무겁고 딱딱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원더랜드'는 결국 사랑 영화다. AI 기술 발달로 원하면 언제든지 죽은 사람과 영상통화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아낸 이 영화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나서도 계속 사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관해 말한다. 억지로 이어 붙인 사랑을 마주하면서 느끼는 혼란, 그렇게 만들어진 사랑의 정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해낸 새로운 사랑의 방식, 그렇지만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그 사랑의 공허함, 결국 왜곡되고만 사랑의 형태가 있다. '원더랜드'는 크게 보면 두 가지, 잘게 나누면 다섯 가지가 되는 이야기를 교직하며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로 나아간다. 단순히 에피소드가 다양한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이야기 속 캐릭터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밀도가 높기도 하다.
'원더랜드'는 앞서 AI를 다룬 선배 영화들과 공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대목에선 스티븐 스필버그의 'A.I.'(2001)가 떠오르고, 또 다른 순간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2014)를 생각나게 한다. 어떤 이야기는 마이클 알머레이다 감독의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2017)에 영향을 받은 것 같고, 어느 지점에선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엑스 마키나'(2015)처럼 서늘하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난 텍스트는 편하게 볼 수 있는 멜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워낙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 보는 이에 따라 콘텍스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원더랜드'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고, 좋은 영화가 대개 그렇듯 러닝 타임이 모두 소진된 뒤에도 이 작품이 던진 각종 물음에 관해 누군가와 대화해보고 싶을 것이다.
설계가 치밀하고 질문은 정확하며 동시대성까지 갖춘 작품인 건 맞지만 '원더랜드'에는 관객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한 강렬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깊이 파는 대신 폭을 넓힌 선택 때문일 게다. '원더랜드'는 캐릭터와 스토리가 많은데다 중층적이기까지 하다. 인간과 관계에 관한 얘기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기술과 관련된 각종 정보 역시 빼곡히 담겨 있다. 이 모든 걸 러닝타임 113분 안에 아우르려다보니 관객이 공감하며 몰입해 들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기 위해 날을 세운 영화들에서 감지되는 불편함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착하고 순해 보이는 이 영화가 이를 테면 마라와 탕후루에 길들여진 요즘 관객에게 과연 매력적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2021년 초 추가 촬영까지 모두 끝마치고도 팬데믹 영향으로 3년 간 관객을 만나지 못한 게 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도 지켜봐야 한다. 이 기간 AI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원더랜드'가 보여주는 미래 세계가 멀지 않았다는 걸 실감할 정도가 됐다(이미 일부 기술은 현실에서 구현 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원더랜드'에 있어야 할 SF장르물로서 매력을 반감하는 악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불가항력이 초래한 일이고 결과론적인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원더랜드'는 인공지능 기술보다 중요한 것들 다루는 작품인 것도 맞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더 일찍 공개됐더라면 유지됐을 신선함이 개봉 지연으로 일부 사라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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