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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inNess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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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다 제쳐두고 일단 마지막 장면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 단언하자면 영화 '아노라'(11월6일 공개)의 마지막 신(scene)은 올해의 엔딩이다. 올해의 엔딩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아노라'는 어떤 방식으로 보더라도 빼어난 작품이지만, 션 베이커(Sean Baker·53) 감독이 올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품에 안게 된 데는 이 장면의 지분이 가장 커 보일 정도다. 섹스와 마약, 고성과 폭력, 좌절과 수모가 요동치는 애니(미키 매디슨)의 여정을 정신 없이 따라가다가 정적 속에서 와이퍼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오면, 당신도 저 악착 같은 여자를 안아주고 싶을 것이다. '당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뉴욕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는 애니(아노라)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고객으로 맞게 되고, 철저한 금전 관계로 맺어진 섹스 파트너를 넘어 급기야 그와 결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아노라'는 베이커 감독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완결판이자 정점이다. '스타렛'(2012) '탠저린'(2015)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등 그의 전작은 성노동자·성소수자·이민자·하층민 등 소위 비주류 인간들의 삶과 알게 모르게 그들을 타자화·대상화하는 개인적·사회적 억압을 담아왔고, 새 영화 역시 이 맥락을 계승한다. 애니는 러시아 이민자 자손이고,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스트리퍼이며, 가장 잘사는 나라의 가장 큰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베이커 감독의 전작을 경유한다는 점에서 '아노라'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성실히 쫓아온 관객에게 더 흥미로운 영화가 된다. 갑작스럽게 행운을 맞닥뜨린 여자의 불안한 눈빛에선 세이디를 만난 제인이 엿보이고('스타렛'), 비주류들끼리 치받는 악다구니에선 거리를 방황하던 신디와 알렉산드라가 감지된다('탠저린'). 디즈니월드로 신혼여행 가는 게 꿈이었다는 말에선 디즈니월드 주변을 배회하던 헬리·무니 모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플로리다 프로젝트'). '아노라'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션 베이커 필모그래피를 마치 복습하는 것처럼 하나씩 밟아가며 이건 누가 봐도 션 베이커의 영화라는 걸 선언한다.
그렇다고 동어반복은 없다. 언뜻 유사해 보이나 베이커 감독은 명확한 목표와 의미를 담은 변주로 지난 영화와 새 영화를 구분한다. 우선 애니는 베이커 감독이 창조한 캐릭터 중 가장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이다. 또 비정해 보일 정도로 희망에 인색했던 그는 이번엔 감당조차 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행운을 이 아웃사이더에게 가져다 준다. 여기에다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따뜻한 오지랖을 가진 인물까지 투입한다. '아노라'는 이런 변화를 기반으로 베이커 감독 작품 세계를 확장해 앞선 그의 영화들이 도달하지 못한 극적 순간을 끌어낸다. 션 베이커 영화의 가장 영화적인 찰나가 그가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예술 세계를 넓혀간 끝에 탄생했다는 점에서 '아노라'는 분명 그의 최고작이다.
일단 '아노라'는 베이커 감독의 영화 중 성노동을 직업으로서 가장 명백히 지지한다. 이 작품 오프닝 시퀀스는 애니를 비롯한 스트리퍼들이 얼마나 능숙하고 성실하게 그들의 일을 해내는지 보여준다. 사무원처럼 출근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웃으면서 해내는 그들은 여느 노동자와 다르지 않다. 고객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애쓰는 애니는 이반이 갑부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가 사적인 호감을 수 차례 표현할 때까지도 철저히 계약 관계로 남으려고 한다. 애니가 이반과 결혼한 자신을 "prostitute" "hooker" "whore" 등으로 표현하는 데 분노하는 것은 그 결혼은 이를테면 '꽃뱀짓'으로 낚은 게 아니라 평범한 결혼과 다르지 않게 우연찮은 인연이 도달한 결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가 가장 천시하는 직업을 가진 여성에 대한 '아노라'의 시각은 당연하게도 그 모든 아웃사이더·소수자로 향한다. 주류 사회가 배제하고 외면하고 있으나 그 외진 곳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 그들 역시 당신들과 다름 없이 인간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발악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견디며 살아 간다는 것. 그걸 '아노라'라는 제목으로 분명히 한다. 아노라는 애니의 본명. 그래서 '아노라'는 애니의 이름을 되찾아주려고 하고, 그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아노라의 존재를 확인한다. 아노라는 더 이상 스타가 되지 못한 스타렛 혹은 오렌지가 되지 못한 탠저린으로 불려선 안 된다. 아노라 미히바는 아노라 미히바. 그래서 이고르는 아노라에게 말한다. "진짜 이름이 뭐야? 아노라? 난 아노라가 더 좋은데."
이 관점에서 보면 '아노라'는 그의 결혼을 무효화 하기 위해 합심한 토로스·가닉·이고르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큰 권력을 가지고 있긴 해도 이반의 처지라고 대단치는 않다. 이들 모두 완벽한 영어 발음, 미국 국적, 백인이라는 미국 사회 주류가 되기 위한 조건을 온전히 충족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토로스와 가닉은 이반의 부모에게 어떻게든 잘 보여야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이고르는 토로스와 가닉에게 고용돼 있지 않나. 아노라가 토로스와 가닉에게 "빌어먹을 알바니아인"이라고 하거나 이고르에게 "깡패"라고 하는 건 그들 역시 아노라처럼 타자화 된 존재라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이반은 돈은 많아도 그 돈으로 미국 시민권을 사진 못한다.
다만 '아노라'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그릴 때 으레 강조하고 묘사하곤 하는 편의적인 연대에 명확한 거부 의사를 밝힌다. 베이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식적으로 끼워 맞춰놓는 듯한 연대는 종종 피상적이다 못해 시혜적이다. 현실을 부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며, 현실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영화는 이 메시지를 이고르를 향한 아노라의 일관된 반감으로 드러낸다. 이고르는 베이커 감독 전작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지만, 아노라는 그를 "싸이코"로 부르며 위악을 부린다. 인생 최대 굴욕을 모두 목격한 사람, 그래서 나를 연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꼭 이고르가 아니더라도 아노라는 살아갈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고르를 혐오하던 아노라는 왜 결국 이고르 품에 안겨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가. 긴 시간 쌓여온 설움이 결국 폭발한 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틀리지 않은 얘기이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아노라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것만 같아서 부족해 보인다. 아노라는 말하자면 할 줄 알고 해줄 수 있는 게 성노동 밖에 없어서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이고르의 마음을 받을 줄도, 그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서 감사를 표할 줄도 모르게 돼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에게 남자란 성노동의 대상이 아니면 자신을 강간하려는 존재가 돼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아노라는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이렇게 돼버린 그 세월과 처지가 서러워서 울고 있는 것만 같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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