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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inNess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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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1960~70년대 국내 그룹 사운드 시대를 이끈 기타리스트 김홍탁이 별세했다. 향년 80.
7일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와 업계에 따르면, 김홍탁은 폐암으로 투병하다 이날 눈을 감았다.
고등학생 당시 인천 주변의 미군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한 고인은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성빈과 함께 그룹 사운드 '키보이스' 일원이 되면서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키보이스는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주로 커버 무대를 선보이며 196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다.
김홍탁은 키보이스를 떠난 뒤에 위상이 더 높아졌다. 1968년 한웅, 김용호, 유영춘, 조용남 등 당시 신진 뮤지션들이 그를 리더로 추대해 '히파이브(He 5)'를 결성했다.
히파이브는 1970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 ㄴ'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당대 최고의 그룹 반열에 올랐다. 멤버 변동 끝에 '히식스(He 6)'로 이름을 변경한 이후에도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히식스는 '초원' '초원의 사랑' '초원의 빛' 등 '초원 시리즈' 히트곡을 남겼다.
김홍탁은 히식스에서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 '당신은 몰라'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당신은 몰라'는 히식스 멤버였던 최헌이 그룹 사운드 '검은나비'에서 히트시킨 곡이기도 하다.
김홍탁은 1997년엔 서울 대학로에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창립했다. 이곳 원장으로 오랜 기간 후학을 양성했다.
'국내 그룹사운드 명예의 전당'을 만드는 게 꿈이었던 고인은 이를 위해 '김홍탁 유튜브'를 개설, 수많은 그룹사운드의 선후배 뮤지션들을 인터뷰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헌신했다. 이 작업을 별세 직전까지 진행해 왔다.
박성서 평론가는 "최근엔 건강이 악화돼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늘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야 하기에, 그 무거운 걸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늘 고인 이름 앞에 붙는 '기타의 파이오니어'라는 별칭이 증명하듯,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1세대로서 그 흐름을 이어오고 한 번도 그룹 음악을 떠난 적 없이 별세 전까지 무대에 섰다"면서 "우리나라 그룹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또 후배들에게 이어지기를 바라며 열정적이면서도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인물"이라고 기억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7일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와 업계에 따르면, 김홍탁은 폐암으로 투병하다 이날 눈을 감았다.
고등학생 당시 인천 주변의 미군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한 고인은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성빈과 함께 그룹 사운드 '키보이스' 일원이 되면서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키보이스는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주로 커버 무대를 선보이며 196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다.
김홍탁은 키보이스를 떠난 뒤에 위상이 더 높아졌다. 1968년 한웅, 김용호, 유영춘, 조용남 등 당시 신진 뮤지션들이 그를 리더로 추대해 '히파이브(He 5)'를 결성했다.
히파이브는 1970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 ㄴ'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당대 최고의 그룹 반열에 올랐다. 멤버 변동 끝에 '히식스(He 6)'로 이름을 변경한 이후에도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히식스는 '초원' '초원의 사랑' '초원의 빛' 등 '초원 시리즈' 히트곡을 남겼다.
김홍탁은 히식스에서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 '당신은 몰라'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당신은 몰라'는 히식스 멤버였던 최헌이 그룹 사운드 '검은나비'에서 히트시킨 곡이기도 하다.
김홍탁은 1997년엔 서울 대학로에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창립했다. 이곳 원장으로 오랜 기간 후학을 양성했다.
'국내 그룹사운드 명예의 전당'을 만드는 게 꿈이었던 고인은 이를 위해 '김홍탁 유튜브'를 개설, 수많은 그룹사운드의 선후배 뮤지션들을 인터뷰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헌신했다. 이 작업을 별세 직전까지 진행해 왔다.
박성서 평론가는 "최근엔 건강이 악화돼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늘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야 하기에, 그 무거운 걸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늘 고인 이름 앞에 붙는 '기타의 파이오니어'라는 별칭이 증명하듯,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1세대로서 그 흐름을 이어오고 한 번도 그룹 음악을 떠난 적 없이 별세 전까지 무대에 섰다"면서 "우리나라 그룹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또 후배들에게 이어지기를 바라며 열정적이면서도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인물"이라고 기억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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